2005년 전담 연구기관 설치됐지만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해산…2019년 재설립 법안도 폐기
#유일한 강제동원 전담 기구
1950년대부터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단 파악에 나섰다. 일본과 배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방일을 앞두고 일본이 가지고 있는 명단을 요구했다. 일본 측은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 이름이 뒤섞여 있어 명단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집요한 요청에 2년에 걸쳐 약 48만 명의 명단을 제공했다. 이 명단은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이 2024년 안으로 전산화를 마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2004년 11월 10일에는 국무총리 직속 기구인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 조사, 자료수집 및 분석, 피해자 유해 발굴 사업 추진, 희생자 및 유가족 심사, 사료관 및 추도공간 조성, 호적등재 등의 업무를 맡았다. 조사 업무는 2년 안에 마치도록 규정했다. 새로 채용된 조사관들은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진상조사는 2005년 4월 15일 처음 시작됐다.
위원회에서 일했던 전문가들의 말과 2021년 주간경향 보도를 종합하면 정부는 2005부터 2008년까지 3번에 나눠 피해 신고를 접수했다. 실질적인 접수 기간은 15개월에 그쳤다고 한다. 이때 22만 8126건의 피해가 접수됐다. 위원회는 피해자를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자, 귀환 후 사망한 자, 귀환 후 생존한 자 등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후유장애를 조사할 전문가가 없어 정신적인 피해는 대부분 인정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증거물 축적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2016년 위원회 사무국이 발간한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위원회는 입수한 사료를 내·외부 전문가의 조사와 검토를 거쳐 증거 가치가 높은 자료를 따로 분류했다. 이를 ‘동원 사실을 위원회가 인정하는 기록(위인정 기록)’이라고 불렀다. 위인정 기록으로는 일본 관청과 기업 등이 작성한 노무자 인명부, 사망자·순직자 명부 등 약 340종이 있다. 위원회는 이 자료를 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DB)화했다.
동행자 찾기 서비스도 실시했다. 위원회는 2008년부터 다수의 피해자가 찍힌 단체 사진 125매를 공개했다. 사진 속에는 신원 미상의 피해자 4500여 명이 실려 있었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식별 번호를 부여받았다. 위원회는 제보자와 대면 조사를 실시했고, 관련 사료를 검토해 사진 속 피해자의 신상을 파악했다. 사진에 나오는 회사 CI로고도 추출해 피해자가 있었던 작업장 명칭, 위치, 동원 유형 등을 파악했다.
생존자와 유족들을 만나 구술기록도 청취했다. 구술기록은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1차 사료다. 당시 15만 건의 강제동원 피해 신고가 접수됐다. 조사1과 소속 조사관 약 30명이 전국을 돌며 구술 자료를 수집했다. 1세대 구술사인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가 직원들을 교육했다. 구술기록은 영상으로 녹화됐다. 당시 경정 계급이던 조지호 경찰청장도 위원회에 파견돼 조사 업무에 투입됐다. 생존자 구술 자료는 2005부터 2015년까지 2021건이 생산됐다.
위원회는 2004~2015년 약 11년 동안 5377건의 자료를 수집했다. 1건은 1장 또는 1점을 뜻하지 않는다. 위원회 해산 후 확보했던 관련 자료는 2016년 6월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됐다. 이때 이관된 자료만 총 44만 4885개에 달했다. 이러한 성과에 정치권은 2년마다 위원회 활동기한을 연장했다. 주간경향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위원들은 1년은 진상조사에 매진했고, 나머지 1년은 기한 연장과 예산 확보를 위해 국회 문을 두드려야 했다.
2007년에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법안에는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때 유가족을 지원하고 피해 신고를 받는 다른 위원회가 설치됐다. 두 위원회가 피해 신고를 받다 보니 혼선이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 두 위원회를 하나로 합쳤다. 이름은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 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로 변경했다.
#폐지 추진 여당, 미온적이었던 야당
2015년 12월 31일 위원회는 11년 만에 해산됐다. 국회가 기한 연장을 골자로 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서다.
취재를 종합하면 당시 박근혜 정부는 위원회 활동 기한 연장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문제 해결을 통한 한일 관계 개선에 방점을 뒀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 28일 일본과의 합의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결됐다고 선포했다.
양승태 사법부와 재판거래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2013년 서울고등법원은 ‘일본제철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각 1억 원씩 배상하라’며 처음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제철은 판결에 불복해 재상고했다. 한일 관계 경색을 우려한 박근혜 정부는 강제징용 판결을 미루거나 판례 변경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요구를 전했고, 양승태 사법부는 이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상고법원 설치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기류는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소위 속기록에도 나온다. 2013년 4월 22일 당시 이명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은 이경옥 안전행정부 2차관에게 “없는 기구도 만들어야 할 상황”이라며 “(위원회 연장) 법안의 내용을 (정부가) 충분히 고려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대운 민주통합당(민주당 전신) 의원도 “(정부가) 위원회 폐지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명수 유대운 의원 등은 위원회 활동 기한 연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경옥 차관은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명수 전 의원은 일요신문에 “이 문제를 역사 속으로 묻어두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원망하고, 피해자 유가족은 지금 정부나 정치권을 얼마나 비판하겠냐고 이야기하면서 설득했는데, 설득이 안 됐다”며 “정부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으면 모르겠는데, 괜히 외교적인 갈등만 증폭해 성과도 없을 것 같다는 기류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 전 의원은 “여야를 막론하고 (위원회 연장에) 별 관심을 안 가졌다. 어느 한쪽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연장 법안이) 통과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의원들에게 위원회 활동 기한 연장을 요청했던 복수의 피해자 유가족의 말을 종합하면 여당인 새누리당은 위원회 해산으로 가닥을 잡았고, 민주통합당은 미온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안전행정위원회 여야 간사는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과 정청래 민주통합당 의원이었다. 복수의 유가족은 조 의원이 위원회 해산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조원진 전 의원 측 관계자는 “당시 위원회 연장의 실효성 같은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 저희는 신중했던 거다. 반대를 표면화한 적은 없다”며 “그런 부분을 대외적으로 표명을 못 하다 보니 유족분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생각하실 수 있었을 거다. 유족분들이 오시면 설명을 듣고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었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 유가족은 “이명수 의원하고 함께 몇 사람이 (조원진 의원에게) 위원회만큼은 해체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결국은 폐지됐다”고 전했다. 이 유가족은 “당시 의원실에 한 번 전화했다. 보좌관한테 (위원회 연장 통과 요청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며 “(반응이 없어) 정청래 의원이 미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위원회 활동 종료를) 여당이 주도하니까 (야당이) 반대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 버린 모습이 됐다”이라고 주장했다.
일요신문은 8월 16일 정청래 의원에게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문자와 전화로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후에도 정치권 기류는 변하지 않았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19~21대 국회 때 발의된 관련 법률안 26개 가운데 두 건만이 원안 가결되거나 수정 가결됐다. 2013년에 통과된 위원회 존속 기한 연장을 골자로 한 법안과 용어를 정비하는 내용의 법안이다.
문희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9년 발의한 위원회 재설립을 골자로 한 법안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019년은 문재인 정부 시기였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범여권이 165석을 확보한 상태였다. 일요신문이 만난 유가족들은 다수 의석을 확보한 민주당이 위원회 부활에 과하게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에 반박하는 연구를 전담하는 기구를 다시 만들지 않으면서 역사 왜곡 사태가 터질 때마다 구호만 외친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위원회는 해산된 다음 다시 설치되지 못했다. 위원회가 수집한 자료는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국가기록원,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등 3개 기관으로 흩어졌다. 대부분의 자료는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됐다. 업무는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지원과, 국가유산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등으로 나눠 맡았다. 강제동원 문제만 전담하는 기구는 현재 없는 상황이다(관련기사 [단독] 휘갈긴 ‘철거예정’만 을씨년스럽게…일제 강제동원 국내 유적지 방치 실태).
그 결과 국내외 강제동원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 유적지는 방치되거나 철거되고 있다. 사도광산 이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추진될 일본 유적지의 경우 학술적인 연구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정혜경 대표는 8월 8일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연구자가 없다. 대응 못 한다. 박수 치고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관련기사 [인터뷰] 국내 유일 사도광산 연구자 정혜경 “강제성 빠져 아쉽지만 디테일 확보 진전).
이명수 전 의원은 “우리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지금 역사를 잊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되물으며 “지금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공격에 대해 우리의 무기나 전략이 별로 없다. 안타깝다”고 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