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서 보던 ‘베테랑’ 세계에 입성→칸 기립박수까지 받아…“어머니께 큰 선물 드렸죠”
“제가 ‘베테랑’이 개봉하던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극장에서 보고 정말 충격 받아서 계속 N차 관람(같은 작품을 여러 차례 관람하는 것) 했거든요(웃음). 그때 저는 정말 풋내기에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베테랑2’에 합류하게 됐다니…. 그런데 한편으론 ‘베테랑2’가 9년 만에 제작돼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그 시간 동안 제가 성장해서 이렇게 함께할 수 있지 않았나 싶거든요.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또 생기지 않을까요(웃음)?”
9년 만에 후속작으로 관객들을 마주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2’는 나쁜 놈은 끝까지 잡는 베테랑 서도철(황정민 분) 형사의 강력범죄수사대에 막내 형사 박선우가 합류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범을 쫓는 이야기를 그린다. 정해인은 작품 밖과 마찬가지로, 안에서도 ‘베테랑’ 세계관에 처음으로 합류하게 된 막내 형사 박선우를 연기했다. 뉴페이스 박선우는 정해인 특유의 말갛고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UFC 형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강한 무력을 지녀 서도철 형사의 특별한 아낌을 받는다. 그러나 실상은 비뚤어진 정의를 강요하며 사적 제재를 이어가는, ‘돌아버린 눈빛’을 가진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다.
“박선우란 인물은 나르시시즘이 강하고 소시오패스 기질도 다분해요. 촬영 전부터 소시오패스를 공부하면서 이런 기질의 사람들이 가진 성향을 알아봤어요.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내가 낫다, 모든 건 다 내 통제하에 이뤄진다’는 전제를 가진 채로 우월감에 빠져있죠. 선우도 이런 여유로움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미소가 나오는 거예요. 또 소시오패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내가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거나 변수가 생기면 분노를 참지 못한다는 거죠. 얼핏 보면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제가 철저히 공부하고 분석해서 그려낸 게 바로 박선우예요.”
개봉 전까지 대중들에게 박선우의 정체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실제 영화에선 이미 극초반부터 그가 범인임을 모두 알려준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찌 보면 그의 정체 자체를 반전이라 생각한 관객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한 ‘반전의 반전’인 셈이다. 오히려 진짜 반전은 박선우의 정체보단, 그가 빌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명확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라는 관람평도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흥행 가도를 달리는 것과는 별개로 ‘베테랑2’의 실관람평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데엔 박선우의 서사가 없다는 점이 큰 이유로 지적되기도 했다.
“저도 서사가 없다는 점이 확실히 연기하는 데 액션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어요. 정해인이란 배우가 박선우란 인물을 연기하려면 저 역시도 이 인물에 체화돼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90% 이상 인물을 이해해서 다가가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려웠어요. 저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지점이 많아서 혼자서 ‘얘 왜 이래?’ 이러고 있었죠(웃음). 정상인의 입장으로 바라봐선 안 되는 시선들이 선우에게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 철저하게 ‘목적’ 위주로만 움직이도록 했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도구로만 이용하는 식으로 이해했죠.”
박선우는 정해인의 연기 인생 첫 빌런으로도 의미가 깊은 캐릭터다. 그렇기에 이해도에선 몇 % 부족함이 있더라도 관객들에게 그 결핍을 들키지 않도록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몰입했기 때문인지, 촬영이 모두 끝났을 땐 도리어 캐릭터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진땀을 흘렸다는 뒷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런 캐릭터가 확실히 정신건강엔 이롭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자주 하면 안 되고, 가끔만 해야겠어요.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던 작품이었거든요. 저는 정해인이란 인간과 캐릭터를 분리시키려 노력하는 편인데,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촬영장에서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자꾸 제 삶에 박선우가 묻어 나오더라고요. 촬영 기간에 특히 어머니가 저보고 ‘낯설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동안 사람들을 멀리하고 가급적 안 만나려고 했죠. 상처 줄 것 같았거든요(웃음). 촬영이 끝나고도 제 안에 박선우가 남아 있을까봐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울 정도였어요.”
그래도 지금 와서 다시 ‘베테랑2’ 현장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삐져나왔다. 2015년의 정해인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세계 속, 함께하고 싶었던 이들에 둘러싸인 매일매일이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 전편의 배 이상으로 강화된 ‘류승완 액션’을 주연으로서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는 건 지금 다시 생각해도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고. 남산 산책로를 오르내리며 쫓고 쫓기고, 물이 자박하게 깔린 옥상에서 미끄러져가며 죽기 살기로 싸운 뒤 터널 속 최후의 1대 1 액션 신에 이르기까지. 관객 입장에선 어느 한순간도 ‘도가니’가 성해 보이는 신이 없었지만 그마저도 ‘훈장’이라는 게 정해인의 이야기다.
“확실히 도가니를 갈아버리는 액션이긴 했죠(웃음). 제가 무릎으로 슬라이딩해서 차는 장면을 보고 다들 걱정하셨는데, 사실은 장치와 특수장비를 착용하고 안전하게 촬영한 장면이었어요. 다만 용기는 많이 필요했죠(웃음). 제가 주저하지 않도록 류승완 감독님이 ‘할 수 있어!’라는 믿음을 주시니까 그걸 믿고 했어요. 사실 스턴트 배우님도 계셨는데 제가 액션을 그분들만큼 하니까 감독님이 자꾸 제가 직접 하게 시키시더라고요(웃음). ‘너 이거 해볼래?’ 하시면서 약간의 도발(웃음)? 그러니 저도 질 수 없어서 더 나서서 했죠. 안전하게 찍었기 때문에 큰 부상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베테랑2’는 정해인의 ‘칸 영화제’ 입성작이기도 했다. 제77회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돼 국내 개봉 전 먼저 선보였던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는 정해인과 황정민, 류승완 감독, 그리고 정해인의 어머니가 함께했다. “어머니가 원래 저한테 들이대시는 스타일이 아니시거든요. 그런데 제가 칸에 가게 됐다고 하니, ‘나도 가고 싶다’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큰 용기 내신 거죠.” 지금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가슴도 먹먹해졌다.
“처음엔 저도 고민이 많았어요. 저희 어머니를 모두가 의도치 않게 신경 쓰실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에 많이 걸리더라고요. 그러다 이번 기회가 정말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란 걸 알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죠. 돌이켜 생각해 봐도 제 배우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뤼미에르 극장에서 기립박수를 받을 때 같은 공간에서 어머니가 모든 걸 다 보고 계셨다는 것 자체가 정말…. 그때 어머니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아무 말씀 없이 우시기만 했는데 저도 보면 울음 터질까봐 일부러 외면하고 그랬죠(웃음). 나중에 제게 그러셨어요. ‘평생 못 잊을 추억이다. 큰 선물 줘서 고맙다’고요. 올해 들어 정말 잘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처럼 ‘베테랑2’는 정해인에겐 여러 갈래의 의미로 남음과 동시에 관객들에겐 이제까지 알 수 없었던 배우 정해인의 새로운 모습을 안겨줬다. 특히 그조차도 “정말 낯설었다”고 혀를 내두르게 했던 박선우의 날선 눈빛 연기는 ‘베테랑2’의 전체 서사엔 만족하지 못한 관객들마저도 이견 없는 호평을 이어가게 할 정도였다. 첫 빌런 역할로서 이 정도라면 합격점을 아득히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니 앞으로 이보다 더 악랄한, 그러면서도 복잡한 서사까지 가진 또 다른 빌런으로서의 정해인을 볼 수 있을 날도 아주 멀지는 않은 것 같다.
“어휴, 제가 칭찬 알레르기가 있거든요(웃음). 누가 칭찬해주시면 양가감정이 들어요. 너무 감사하고 좋으면서도 부끄럽고 민망하고 어쩔 땐 무섭기도 해요(웃음). 다만 제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하나는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만일 그게 없었다면 저 스스로 재미없다고 느꼈을 거고, 연기하면서 즐겁지 않았을 거예요. 류승완 감독님이 이번 작품에서 전편에서 하셨던 방법이나 장치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싶지 않다 하셨던 것처럼 저도 배우로서 그런 마음이 있어요. 앞으로도 묵묵히, 차근차근 다양하게 도전해나갈 생각입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