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감독 승격에 일부 팬 불안한 시선도…줄부상·1경기 30실점 등 탈 많았지만 ‘형님 리더십’으로 극복
해태 타이거즈 시절 포함 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한 KIA는 지금까지 한국시리즈에 11번 진출해 단 한 번도 우승을 내준 적이 없다. 즉 한국시리즈 진출 시 100%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과연 KIA는 올 시즌에도 12번째 우승을 올리며 그 기록을 이어갈 수 있을까.
2024시즌 KIA 타이거즈는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대형 악재를 맞이했다. 2022시즌부터 2023시즌까지 팀을 이끌었던 김종국 전 KIA 감독이 금품수수 혐의로 해임됐기 때문이다. KIA는 스프링캠프 전부터 야구 전문가들이 꼽은 우승 후보 중 한 팀이었다. 막강한 타선과 단단한 선발진, 전상현-장현식-정해영으로 이어지는 필승조까지 더해져 강팀의 조건을 모두 갖춘 팀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시즌 시작을 알리는 스프링캠프가 ‘감독 이슈’로 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KIA는 진갑용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선임한 뒤 스프링캠프를 시작했고 심재학 단장은 서둘러 감독 선임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내부 승격과 외부 인사 영입 등 다양한 방안이 거론됐다. 당시 미국 연수를 떠난 이종범 전 LG 트윈스 코치를 비롯해 여러 감독 출신들이 KIA 감독 후보군으로 거론됐고, 내부에서는 진갑용 당시 수석코치, 이범호 1군 타격코치, 손승락 퓨처스팀 감독 등도 차기 감독 후보로 언급됐다.
KIA는 고민 끝에 외부 인사가 아닌 내부 사정에 능통한 이범호를 팀의 11대 감독으로 선택했다. 10개 구단 최연소 사령탑이었다. 이범호 신임 감독은 KIA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후 2021시즌 2군 총괄 코치, 2022시즌, 2023시즌 1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KIA는 이범호 감독 선임 당시 “팀 내 퓨처스 감독 및 1군 타격코치를 경험하는 등 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높다. 선수단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과 탁월한 소통 능력으로 지금의 팀 분위기를 빠르게 추스를 수 있는 최적임자로 판단해 선임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 야구팬들은 ‘초보 사령탑’ 이범호 감독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감독 경험 없는 초짜 감독이 KIA라는 큰 배를 제대로 항해해 나갈 수 있을지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범호 신임 감독은 취임 인터뷰에서 올 시즌 목표를 ‘우승’이라고 못 박았다. 스프링캠프에서 타격코치를 맡던 이가 갑자기 신임 감독으로 선임된 상황이라 초보 감독의 시즌 목표를 그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범호 감독은 ‘초보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정규시즌 내내 과감한 선수단 운영과 판단력으로 6월 12일 LG 트윈스를 제치고 선두로 올라선 이후 단 한 번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고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긴 시즌을 치르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존재한다. 예상치 못한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 외국인 선수들의 경기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등 대부분의 팀들이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범호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시즌 초반부터 부상 악령이 선발진을 괴롭혔다. 시작은 윌 크로우였고, 이후 이의리, 윤영철, 제임스 네일까지 선발 투수 5명 중 4명이 부상으로 자리를 비웠다. 정규시즌 개막 때부터 지금까지 선발진을 지키고 있는 선수는 양현종 한 명뿐이다. 타선의 중심인 나성범은 시즌 개막 후 한 달이 지난 4월 28일에야 처음 경기에 나섰다.
구멍난 선발진과 타선이 침체기를 겪으며 1위를 이어가면서도 대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중 가장 잊지 못할 경기가 7월 31일 광주 두산전에서 6-30으로 패한 경기일 것이다.
당시 KIA는 단독 1위였지만 몇몇 경기에서 굴욕에 가까운 졸전을 펼쳤다. 6월 25일 사직 롯데전에서 13점 차를 지키지 못하고 난타전 끝에 15-15 무승부를 거뒀고, 6월 28일 광주 키움전(6-17 패)에서는 3회 ‘한 이닝 10실점’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가운에 두산과의 3연전에서 투타와 수비에서 1위 팀답지 않은 경기력으로 팬들에게 실망을 안겼고, 30실점으로 ‘KBO리그 역대 한 경기 최다 실점’을 허용하는 진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부 KIA 팬들은 이범호 감독의 경기 운영을 비판하는 문구를 붙인 트럭 시위를 펼쳤는데 리그 1위 팀 감독이 트럭 시위의 대상이 됐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이 감독은 30실점 이후 취재진들과의 인터뷰에서 30실점도 똑같은 1패라며 덤덤하게 반응했다. 실망감이 컸을 KIA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선수들이 스스로 회복해나가길 바랐다. 자신의 경험상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 따로 미팅을 갖거나 체력적,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선수들에게 일일이 지적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KIA는 여러 위기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이 과정에서 역대 최연소 30홈런-30도루를 달성한 김도영이 타선을 이끌었고, 최형우와 나성범, 소크라테스 브리토 등이 결정적인 공격의 첨병 역할을 맡아 승리를 이어갔다.
이범호 감독은 정규리그 1위 확정 후 소감으로 “너무 많은 시련을 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상 선수들이 한 명씩 늘었다”면서 “윌 크로우가 나갔을 때 큰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의리가 나갔고 또 (윤)영철이가 빠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쳤다”고 회상했다.
성적이 좋을 때는 감독보다 선수의 역할에 더 많은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감독의 지도력에 의구심을 나타내며 비난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초보감독’ 이범호는 올 시즌 이런 과정을 올곧이 감당해냈다.
2000년 한화 이글스에서 프로에 데뷔한 이범호 감독은 2010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다 2011년 KIA로 복귀 후 2019년 7월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감독은 은퇴 후 곧장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이듬해 2월 초부터 필라델피아 필리스 마이너리그 캠프에 입성, 본격적인 코치 연수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출근해 저녁 7시에 퇴근하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나이 어린 선수들과 부대끼는 시간들은 그에게 엄청난 보람과 행복을 안겨줬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가 중단되면서 코치 연수도 조기 종료됐지만 이 감독은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일본과 메이저리그 코치 연수가 이후 KIA로 복귀 후 코치 생활을 시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흔히 이범호 감독의 지도력을 ‘형님 리더십’으로 표현한다. 선수 시절부터 동료 선후배들한테 인품이 좋은 야구인으로 평가받았던 그는 해외에서 경험한 코치 연수를 통해 자신만의 리더십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필라델피아 코치 연수 시절 당시 이범호 코치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행복하다. 시간이 갈수록 왜 미국 야구를 배워야 하는지 깨닫는 중이다. 아침에 스태프 미팅하는 자리에 단장부터 코치들, 트레이닝 파트까지 모두 모이는데 거의 대부분 표정이 밝다. 마치 야구에 모든 걸 바친 사람들처럼 즐겁게 일한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절로 환한 얼굴이 된다. 안 웃을 수가 없다. 얼굴 표정이 좋아야 선수들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웃고 다닌다.”
코치 이범호는 선수들한테 필요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 했다. 선수들 사이에서 “우리 팀에 그 코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존재감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는 걸 목표로 삼았다. 은퇴 후 KIA 구단의 지원 아래 해외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귀국 후 팀에 다시 합류했던 이범호는 시기가 문제였지 언젠가는 KIA 차기 감독이 될 지도자로 손꼽혔다. 물론 갑자기 전임 감독의 사건 사고로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만 ‘준비된’ 감독 이범호는 선수 시절처럼 ‘튀지 않고’ 조용히 선수단을 이끌고 우승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과연 이범호 감독은 타이거즈에 1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겨줄 수 있을까.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