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규명 신청 못한 피해자 1심 승소 첫 사례…진화위 내년 활동 종료, 정부 재판 지연 등은 여전히 과제
# 법원 “진실규명 신청하지 않았지만 결정일로부터 3년 도과하지 않아”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부산지방법원 민사제9단독(주은영 판사)은 지난 8월 28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A 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국가가 A 씨에게 2억 6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원고가 청구한 4억 원 가운데 약 65%가 인정됐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원고는 만 18세의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돼 약 3년간 구타 및 가혹행위와 강제노역 등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이 사건은 공권력의 적극적 개입 또는 허가·지원·묵인 아래 장기간 이뤄진 인권침해 사안으로 그 위법성이 매우 중해 유사한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억제·예방할 필요성이 크다”고 판시했다.
이어 “불법행위가 있은 때부터 약 36년 이상 배상이 지연됐고 현재까지도 어떠한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는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시행하면서 내무부 훈령을 바탕으로 운영된 전국 규모의 부랑인 수용 시설이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3만 8000여 명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당시 정부는 부랑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형제복지원으로 납치해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복지원 내에서는 폭행과 낙태, 암매장 등 반인륜적 범죄 행위도 벌어졌다.
국가 측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가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경우 과거사정리법 제2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하므로 손해배상 청구권에 민법상 10년 또는 국가재정법에 따른 5년 소멸시효(장기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봤다.
이번 판결에서 주목할 부분은 A 씨가 진화위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못한 피해자라는 점이다. 그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하고, 조사를 거쳐 국가폭력 피해자가 맞다는 결정문을 받은 후에야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해 왔다. 소송에서의 필수 요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화위 결정문이 유일한 진실규명 창구라고 생각했던 피해자들에겐 당연한 절차이자 관례였다.
이런 가운데 법원이 처음으로 진화위 결정문이 없는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도 소멸하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는 건강상 등의 이유로 진실규명을 신청한 바 없으나 2022년 8월 23일 제1차 진실규명 결정일, 2023년 2월 7일 제2차 진실규명 결정일로부터 3년이 도과하지 않은 때 소를 제기하였으므로 3년의 단기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이 알려지면 더 많은 미조사 피해자들이 소송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11월 7일 법정에서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 아무개 씨는 “어린 시절 복지원에 끌려가 글을 배우지 못했다. 신문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피해자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도 몰랐고 진실규명도 신청하지 못했다”며 “의미 있는 판결이 나온 만큼 다음 소송에는 용기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는 “진화위 결정문이 없다는 이유로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확실한데도 피해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았다”며 “현재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못한 미조사 피해자 50여 명이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진화위, 2년 전 진실규명 신청 접수 종료
진화위 결정문이 없어도 국가배상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은 “진화위 결정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 배상소송은 물론 지자체가 제공하는 생활비 지원 서비스 등에서 결정문이 가지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부산시의 경우 올해부터 부산시에 거주하는 복지원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500만 원과 매달 20만 원의 생활 안정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때도 진화위 결정문이 필요했다고 복지원 피해자들은 말했다.
문제는 진화위 진실규명 접수가 이미 2년 전에 끝났다는 것이다. 2020년 12월 출범한 제2기 진화위는 2022년 12월 진실규명 신청 접수를 마감하고 현재는 조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마저도 현 과거사법에 따라 2025년 5월 활동이 중단될 예정이다. 활동 기간이 끝나면 형제복지원 피해 접수가 들어와도 이를 공식으로 기록해 둘 수 없다는 것이 진화위 측 입장이다. 즉, 접수 사실을 뒤늦게 알았거나 아예 몰랐던 피해자들은 피해 구제를 기대하기 어려운 셈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단체에 따르면 현재까지 진화위 직권조사를 받지 못한 미조사 피해자는 최소 475명에 달한다.
익명을 원한 한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복지원 퇴소 이후 쭉 혼자 살다가 최근에서야 진화위 존재를 알게 됐다. 그런데 이미 신청이 끝났다고 하더라. 피해자들은 그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괴롭게 살고 있는데 피해 회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지난 10월 31일에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30여 명이 미조사 피해자의 직권조사를 촉구하는 한편 진화위의 진실규명 접수 및 조사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정부의 잇단 항소도 문제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2023년 12월 21일 법원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는 판단을 내린 이후 피해자들의 1심 승소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는 “위자료 산정이 과다하다”며 항소를 이어가고 있다.
재판이 길어지는 사이 피해자들은 병들거나 사망하고 있다. 9월 20일 국가배상 판결을 기다리던 형제복지원 피해자 서상열 씨가 부산 동구의 한 여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서 씨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같은 여관에 거주하던 또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였다. 같은 달 8일에는 김대우 씨가 식도암으로 별세했고 지난 3월에는 강귀원 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첫 재판을 두 달가량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대해 형제복지원피해자협의회 관계자는 “국가가 재판을 지연하면서 판결문을 받아보기도 전에 눈을 감는 분들이 생기고 있다. 이미 1심 판결에 선고를 받은 네 분이 사망하셨다. 이건 민주주의의 정의가 아니다. 생존 피해자들은 당시 겪었던 신체적·정신적 피해로부터 오늘날까지 자유롭지 못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며 “국가는 항소를 멈추고, 국회는 하루 빨리 조사 기간 연장 법안을 만들어 피해 사실을 공인 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