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아카데미상과 칸 영화제를 석권한 영화를 동시에 만든 나라,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의 시청시간을 기록한 드라마를 만든 나라, 한국어로 빌보드차트 1위곡을 수없이 많이 만든 나라, 세계 최고의 연주자·운동선수·기업을 만든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긍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지금 이 상황에 전 국민이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빠져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2심에서 유죄를 받아 정치생명이 끝났을 거라는 유력 정치인이 대법원에서 거의 기적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회생을 했다. 진보 정권에서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 일가를 수사하고 급기야는 본인이 보수 정권의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야당은 법안을 의결시키고 대통령은 쉴 새 없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수없이 반복됐다. 사법적인 문제를 갖고 있던 야당 대표는 대다수가 무죄가 나올 것이라는 판결에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실형에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또 다른 재판에서 유죄가 거의 확실하다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나라의 운명이 한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짙은 어둠에 사로잡혔다.
국정감사장에서 한 야당 의원이 ‘계엄령’에 대해 언급하자 국방부 장관은 “2024년에 가능한 상상이냐”며 완강하게 부인했었다. 그런 국방부 장관이 계엄령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대통령은 그 계엄령을 발동시켰다.
2024년 12월 세계에서 인정하는 선진국 반열에 든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계엄령이 발동됐다. 전국민은 혼란에 빠졌으나 다행히도 몇 시간 만에 국회가 계엄해제요구안을 의결하면서 계엄령은 해제됐다.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빠져 구국의 일념으로 계엄령을 발동했다던 대통령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순수하게(?) 계엄령을 해제했다.
30년 넘게 영화 일을 해왔지만 지금 유력 정치인들의 캐릭터나 서사를 상상도 할 수 없다.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예측불가인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다. 이런 상황들을 예상하고 상상해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창작자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아니 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캐릭터, 이런 이야기는 정상적인 창작자라면 만들 수 없다는 데 내 영화 경력을 다 건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콘텐츠 특성 중엔 소위 ‘막장’이라는 불명예스런 수식어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게 말이 돼? 점 하나 붙이고 나오면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하다하다 이제 다 이복남매고 겹사돈이니?”
상상을 못 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인기만 끌고 시청률만 견인하면 된다 해도 이런 이야기,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자괴감이 들게 하는 콘텐츠가 존재한다.
그런데 국민을 이끌고, 희망을 주고, 비전을 제시해야 할 정치가 거의 막장으로 흘러가서야 되겠는가. 자기를 지지하는 진영에게만 어필해도 충분히 시청률이 나오고 남는 장사라면 뭐라도 할 것인가. 막장보다 더한 막장을 만들겠다는 건가.
정치는 막장드라마가 돼선 안 된다. 보고 나서도 뭔가 찜찜하고 불쾌한 작품이 돼선 안 된다. 정치는 고전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받고 삶의 좌표를 만들 수 있고, 읽으면 읽을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도전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 드라마틱하기보다는 안정적이고 감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너무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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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