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 전환 1년 만에 처음 국가대표로 뽑혀…“군복무 기간 나를 잊지 않길 바라”
국내 대부분의 구단이 하나둘씩 2025시즌을 준비하는 시점 황문기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곧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팀 훈련에 합류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그는 "편할 줄 알았는데 쉬는 게 더 바쁘다(웃음). 주중에는 강릉에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다 주말마다 지인들을 만나러 서울을 오간다. 시즌 끝나고 매주 이렇게 보내다보니 최근엔 몸살이 났다"고 말했다.
군사훈련을 위한 훈련소 입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편하게 휴식을 취할 법 하지만 팬들과 스킨십을 늘리고 있다. 그는 지난 연말 자선경기에 출전하는가 하면, K리그 사진전에서는 사인회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 쉬는 기간이기에 바쁠 것도 없다. 당분간 리그에서 뛰지 못한다. 많은 분들이 나를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열심히 행사에 참가하는 것도 있다"며 웃었다.
황문기 소속팀 강원은 2024시즌 K리그1 준우승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불과 1년 전 최하위권을 전전하다 가까스로 1부리그에 살아남은 팀이었기에 놀라움을 더했다. 황문기는 팀 성적에 대해 "시즌 전에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놓기보다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하루 간절하게 준비했다. 준우승이라는 단어를 상상이나 했겠나. 안정적으로 잔류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현실은 냉정하니까"라고 말했다.
시즌을 시작할 때는 개인적으로 부담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부주장을 맡은 채로 시즌을 시작했는데 한국영, 김영빈 형들이 다 부상이었다. (이)광연이와 함께 주장 역할을 해야했다. 팀을 이끌어 나가야 했는데 개인 경기력도 내가 생각한 만큼이 아니었다"면서 "너무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던 것 같다. 2023시즌이 끝나고 군복무를 하려고 했었는데 1년을 미뤘다.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컸다"고 설명했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와 코칭스태프 덕분이었다. 그는 "다행이도 (윤)석영이 형이 많이 도와주셔서 정말 도움이 됐다. 송창호 코치님과 면담도 했었다. 코치님이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셨다. 마음을 편히 먹고 하니까 경기력도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멘털적인 부분이 문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 면에서도 시즌 초반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강원은 첫 4경기에서 승리가 없었다(3무 1패). 개막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첫 승리를 신고할 수 있었다. 황문기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래도 우리가 4경기 동안 이기지는 못 했지만 경기력은 좋았다고 판단했다. 팬들도 차분히 기다려주셨던 것 같다. 4월 들어 대구를 상대로 첫 승을 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돌풍이 거세지기 시작한 것은 6월이었다. 강원은 리그 5연승을 내달렸다. 잠시 리그 1위에 오를 정도로 상승세를 탔다. 이전 2경기 포함 5월부터 6월 중순까지 6승 1무를 기록했다. 황문기는 자신감이 더해졌으나 절박함은 여전했다고 말했다.
"훈련장에서는 마치 연패를 하고 있는 팀처럼 정말 간절하게 준비했다. 우리 팀은 절실함 빼면 시체라고 생각한다. 코칭스태프 분들이 항상 강조하셨던 부분이다. 그렇게 준비를 하면서 실전에서 결과가 따라오니까 아무래도 자신감이 조금 붙게 됐다."
팀의 순위가 급격히 올라갔지만 마음가짐에는 변화가 없었다. 팀 내에서도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정경호 감독님이 '지치면 지고 미쳐야 이긴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우리팀이 선수단 연령이 많이 낮아졌는데 선수들이 끝까지 같은 마음으로 잘 달려서 좋은 결과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황문기 개인에게도 최고의 시즌이었다. 그는 시즌 마지막 부상으로 빠진 2경기를 제외한 전 경기에 그라운드를 밟았다. 교체투입은 단 1경기뿐이었다. 2021년 강원에 입단한 그는 한 시즌을 온전히 주전으로 소화한 경험이 없다. 25경기 가까이 나서더라도 출전 시간은 넉넉하지 못했다.
2023시즌 말 포지션을 바꾼 것이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됐다. 이전까지는 미드필더로 커리어 대부분을 보냈다. 때로는 측면에서 기용됐지만 수비수는 경험이 없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 몇 번 뛰어본 것이 전부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면서 "경기를 많이 못 나가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포지션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포지션을 바꾸고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 그는 생애 최초로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처음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8월 26일은 황문기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오전에 발표가 됐는데 저녁 이후까지도 계속 멍한 상태였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인 줄 알았다. 그날은 밥도 잘 못 먹을 정도로 놀랐다. 기쁨의 눈물을 좀 흘렸다(웃음)."
시즌을 마치고 이어지는 시상식에서는 베스트11에 선정됐다. 자신의 포지션에서 리그 최고의 선수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게 가장 기쁘다"며 "1년 전 군복무를 미루면서 아내에게 국가대표와 베스트11 상 받겠다고 말을 했었다. 아내는 그때 입대하길 바랐는데 설득 과정에서 내가 댔던 일종의 '핑계'였다(웃음). 그런데 그 말들이 정말 실제로 이뤄졌다. 최근에 그 이야기를 다시 아내와 하는데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포지션에서의 성공에 코칭스태프에게 공을 돌렸다.
"지금 자리에서 기회를 주셨고 2023시즌 끝나고 정경호 감독님이 1년 더 해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최효진 코치님은 경기 끝날 때마다 숙소에서 비디오를 함께 보면서 상황에 따른 바디 포지션, 수비 위치 등에 대해 알려주셨다. 워낙 그 포지션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우신 분 아닌가."
화려한 시즌을 뒤로하고 황문기는 1년 9개월간의 사회복무요원 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요원 임무를 수행하고 저녁에는 축구선수로 돌아간다. K4리그 평창 FC 유니폼을 잠시 입는다. 그는 "많은 분들이 평창으로 응원 가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야기는 많이 듣는데 실제로 오시는지는 지켜보겠다"며 웃었다.
황문기가 떠나는 강원 구단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따른다. 먼저 팀을 이끌던 수장 윤정환 감독과 작별했다. 리그 최고의 측면 수비수가 군복무를 위해 떠날 뿐만 아니라 강원이 탄생시킨 스타 양민혁도 잉글랜드(토트넘 홋스퍼)로 향했다. 강원은 최근 수년 동안 들쭉날쭉한 역사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문기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팬들이 '퐁당퐁당(1년마다 격하게 바뀌는 성적)'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것을 안다. 그런데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 우리 팀이 하고자 하는 축구는 확실하다. 그 부분에서 흔들림이 없다. 주축 선수 일부가 빠진다고 해서 안 돌아가는 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경호 감독님이 그런 팀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또한 그는 구단의 문화가 구축돼 있다고 덧붙였다.
"성적이 좋은 시즌에 외부에서 보기에도 '강원은 파이널A(6위 이내)만 들어도 됐다'는 이미지가 있다. 이번에는 내부에서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 안주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정경호 감독님은 '우리가 좋은 선례와 문화를 남겨야 강팀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선수들은 스스로 거만해지는 것을 경계했고 결국 마지막까지 결과를 만들어냈다."
훈련소 입소까지 많은 시간을 남겨두지 않은 황문기였다. 하지만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는 "우리 팀이 2025시즌에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복무지가 멀지 않기에 여건이 된다면 종종 경기장에도 가볼 계획이다. 복무 하면서 재미있게 팀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문기는 1월 6일 강원도의 한 부대에 입소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