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표·디자인 신고 급증, 경쟁업체 영업방해 수단 악용…소명 어렵고 지재권 침해 판단기준 부실해 피해 키워
#상표권·디자인권 신고, 경쟁업체 상대 ‘만능 칼’?
쿠팡·네이버쇼핑·인스타그램 등 국내외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유아용 식품을 판매하던 P 사는 지난해부터 황당한 일을 겪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누군가 P 사가 쓰고 있던 상표와 디자인을 먼저 출원해 등록한 후 판매 플랫폼 쿠팡에 P 사를 상표권 침해로 신고한 것이다. 판매 페이지가 닫히면서 상품 판매가 중단됐다. 매출에도 즉시 타격이 생겼다. P 사가 이후 소명 자료를 제출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P 사는 상품을 다시 디자인했다. 디자인권을 출원한 후 홈페이지에는 출원번호와 함께 올려 자사 고유의 디자인임도 알렸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또 다시 신고가 들어왔다. 이번엔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였다. 놀라서 알아봤더니 제3자가 홈페이지에 노출된 출원번호를 이용해 특허청에 ‘정보 제공’을 요청해 등록 심사를 지연시킨 사실이 확인됐다. 그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해 디자인권을 먼저 등록한 후 신고를 넣었다.
P 사 대표는 “수만 장의 포장지를 인쇄하고 해당 디자인으로 돈도 많이 써서 SNS(소셜미디어) 광고도 진행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또다시 소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셧다운이 됐고 정말 너무 충격적이고 힘들었다”라며 “알고보니 동일한 공급망을 사용하는 경쟁업체에서 작업을 했다. 경쟁업체는 자기보다 판매가 잘되는 것에 대한 위기감으로 우리를 신고했다고 실토했지만 나중에는 신고 사실을 부인했다”라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인스타그램이었다. P 사는 인플루언서들을 활용한 공구(공동구매) 시장에서 상당 규모 매출을 내고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디자인권 침해 신고가 들어왔다. 한번은 경쟁사가 실수로 회사 이름으로 신고를 넣었다가 걸리자 철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지재권 침해 신고가 접수될 경우, 충분한 소명 기회 부여 없이 게시물이 삭제되거나 계정이 폐쇄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팔로어 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 입장에서는 지재권 신고를 견디기가 쉽지 않아 공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악의적인 신고로 심각한 영업 방해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P 사 대표는 “저희 디자인권이 먼저 출원됐는데도 글로벌 플랫폼에서는 소명 기회를 안 주고 있어 속수무책”이라며 “해당 디자인권을 써서 상품을 팔기라도 하면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 수 있는데 영업방해 목적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계속 신고하고 있어서 피해만 받고 있다. 법원으로 가도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 입증하기가 몹시 어렵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디자인권의 경우는 카피 제품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특허청에 디자인을 등록해 디자인권을 획득할 수 있어 피해가 커지고 있다. 의류나 포장지 등 일부 품목의 경우 유행 주기가 빠르기 때문에 특허청이 ‘일부 심사 등록 제도’를 통해 실질 요건 심사를 면제해주기 때문이다. 디자인무효심판이나 이의신청 등을 통해 카피한 디자인권을 무효화할 수는 있지만 여기에도 6개월 이상의 시일이 소요된다.
이와 관련, 브랜드보호센터 이준석 변리사는 “국내 이커머스 플랫폼의 경우 위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디자인권 문제는 소명이 된다. 그러나 신고자만 바꿔서 계속 신고해버리면 무한 반복으로 괴롭힐 수 있고 판매페이지가 한 번 닫히면 열릴 때까지 3~4일은 소요되기 때문에 그 기간에는 계속 매출 타격을 입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P 사 대표처럼 악의적인 상표권 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례는 속출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한 변리사는 “상표권과 디자인권 신고 당하는 케이스가 1~2년 사이에 엄청나게 늘고 있다고 업계에서는 다들 체감하고 있다. 마케팅 업체라든지 경영 컨설팅 업체들이 경쟁자들의 판매페이지를 당장 내릴 수 있는 전략이라고 소개하면서 부추기고 있어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라며 “네이버스토어나 쿠팡에서는 인기 업체들 하루 매출만 수십억 원이기 때문에 당장 며칠만 장사가 막혀도 공장 가동까지 중단해야 해 피해가 막심할 우려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소명 기준 개선 목소리
가장 큰 문제는 이커머스 플랫폼의 지재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전문적이지 않아 피해를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는 지재권 침해 신고가 접수된 후 3일간의 소명기간을 먼저 준다. 쿠팡은 신고가 들어왔을 경우 우선 판매 페이지를 닫은 후 소명이 되면 열어주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요구하는 대표적인 소명 자료는 상표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취지 등의 확정 판결문이다. 그러나 판결문이 나오는 데는 통상 2년 가까운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고, 그 기간 동안 상대방은 쉽게 시장에 진입해 파이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 판매자는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입을 수밖에 없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잘 팔리면 얼토당토않은 걸로 공격해서 판매를 막아버린다니 너무 지나치다. 플랫폼은 플랫폼대로 셧다운까지 걸리는 기간도 너무 짧고 판단도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라며 “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마일스톤 특허법률사무소의 김동현 대표 변리사는 “각 이커머스 플랫폼의 CS팀에서 응대하는 구조인데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씩 침해 신고가 들어오기 때문에 매번 법리 검토를 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라며 “미국 아마존 같은 경우는 상표권 분쟁이 워낙 빈발해서 골머리를 앓다가 ‘아마존 브랜드 레지스트리(ABR)’를 만들어서 해결했다”라고 말했다.
ABR은 아마존 입점희망자가 미국 특허청에 먼저 상표권을 등록해야만 아마존에 브랜드를 등록할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다. ABR 도입 후 공신력 있는 브랜드만 아마존에 입점할 수 있게 됐고 분쟁과 신뢰 문제가 동시에 해결됐다. 김동현 변리사는 “그러나 미국은 상표권 분쟁 발생 시 플랫폼에도 배상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국내는 플랫폼의 주의 관리 의무도 없고 문제 발생 시 배상 책임도 크지 않다보니 개인 간의 분쟁 문제로만 보고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기조가 강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이준석 변리사는 “변리사회 주도로 이커머스 플랫폼과 논의할 협의체나 기구를 만들어 실무자들에게 지재권 위반 여부를 판단할 기준을 교육하거나 참고할 규정을 만들어주려고 준비 중”이라며 “지재권 보호를 규정한 취지에도 완전히 어긋나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시장이 완전히 망가지거나 대규모 사회 문제로 번질 우려가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