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신화에서도 종종 뱀이 등장한다. 영웅은 뱀의 눈을 가졌다고도 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도 뱀은 독수리와 더불어 창조하는 자, 차라투스트라를 인도하는 벗이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나의 뱀처럼 철저하게 영리해지고 싶다.”
뱀의 지혜는 세상을 품어 안는 후덕한 지혜가 아니다. 자극할 때는 자극하고, 싸울 때는 싸우고, 버릴 때는 버리는 땅의 지혜, 차가운 지혜다. 그런 지혜가 필요한 한 해이니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지나갈까.
뱀을 이야기할 때 창세기를 빼놓을 수 없다. 거기서 뱀은 유혹자로 나온다. 뱀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만든 존재다. 선악과의 맛에 취한 하와는 그 과실을 아담에게까지 권해주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된 것이다. 우리를 자극한 뱀은 우리를 에덴에서 쫓겨나게 한 후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린 그 무엇이었다. 뱀이 소란스럽게 만든 자리, 우리의 역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 아담이, 창조된 여자를 보고 감탄하며 던진 말은 아마 최고의 사랑시일 것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어야 나올 수 있는 탄성이다. 확실히 에덴에 사는 사람들의 고백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마음속에 이 멋진 시를 품고 있었던 아담이 왜 또 그렇게 됐을까?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신의 물음에 변명에, 책임전가까지 한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이 남자, 그 남자 같지 않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경탄했던, 그 남자, 그 시인, 같지 않다. 그렇게 사랑에 빛났던 남자가 “여자 때문이었다”며 변명한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비겁해지고 비루해졌을까. 아담은 신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두려움에 숨기까지 한다. 그렇게 나약해지고 소심해진 이유는 아마도 우리 안에 내재한 신의 형상을 잊은 결과겠다.
그것이 아담만의 문제일까. 우리는, 나는,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 물음을 품고 살고 있을 만큼 자기 삶을 살고 있는지.
혹 우리도 종종 아담처럼 책임회피를 하며 가까운 사람에게 책임전가를 한 적은 없는지. 살면서 책임전가 한번 하지 않고 살아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그 버릇이 일상화된다면? 끔찍하다.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내 삶의 일들을 소화해내지 못해 남 탓으로 돌리는 동안은 우리는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남편 탓, 아내 탓, 자식 탓, 동료 탓 등등 남 탓이 체질화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기대에 속고 있거나, 자기 이상에 눌려 있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느라 생긴 대로 살기 힘든 것, ‘존재’가 힘든 것이다. 거기에 에고가 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며 스스로 괴롭히고,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냐, 그것밖에 할 수 없냐며 가까운 이를 질책하고, 저 엄친아를 보라고 비교하면서 그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채찍이라 우기는 데에는 생긴 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에고의 집착이 있다.
자기 인생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가까운 이의 인생을 걱정하거나 간섭하거나 힐책하면서 우리는 배웠다. 그것이 아프고 소란스러운 나날들의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그런 나날들을 거치며 지금 딴판으로 살아가는 이유, 내가 저지른 과오의 강을 건너며 여전히 돌이키지 못하고 과거의 습관을 반복하는지, 아니면 돌이켜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그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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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