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 이어 또 한 번 호평 얻어낸 열연…“양정숙 역할 완벽하게 소화한 임수정에 감탄”

1970년대, 신안 앞바다에 묻힌 보물선을 도굴하기 위해 모인 탐욕에 눈이 먼 촌뜨기들의 이야기를 담은 ‘파인: 촌뜨기들’에서 류승룡은 이들의 리더 오관석을 연기했다. 젊은 시절부터 좀도둑질로 먹고살며 법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등 ‘치사하고 못됐지만 악랄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던 오관석은 보물선이라는 거대한 부를 맞닥뜨리면서 점점 커지는 탐욕에 휘둘리게 된다.
“저는 관석이가 처음부터 그런 악인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다 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였겠죠. 그때는 정말 사회가 무풍지대였거든요. 지금도 돈이 있으면 편리하지만 그때는 그냥 돈이 법이었어요. 돈이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으니 사람들도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을 거예요. 관석의 조카인 희동(양세종 분)도 악인이지만 이 친구는 사람을 해친다는 선을 절대 넘지 않아요. 반면 관석은 고민을 좀 하긴 하지만 그걸 결국 쉽게 넘어버리죠.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오관석은 푼돈 벌이나 되는 좀도둑질하던 삶에서 재벌 회장을 우려먹을 수 있는 거대한 사기 행각에 휘말리게 되는 순간부터 살인까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악인이 된다. 그러나 막상 100% 악인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지점이 있다. 자신을 배신하고 도자기를 훔쳐 달아난 조카 희동을 용서하고,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린 자식들에게 반찬을 밀어주고 성적 이야기를 하며 부드럽게 나무라기도 한다. 혈육 앞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한 오관석에 대해 류승룡은 “관석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크든, 작든 악인이고 범죄자지만 이 가운데서도 오관석 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감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악인이 바로 양정숙(임수정 분)이다. 보물섬 도굴을 지시한 회장의 두 번째 아내인 그는 거칠고 험한 도굴꾼들을 좌지우지하며 절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오관석과 함께 유이하게 아이큐가 100이 넘는 인물일 것”이라는 농담을 던진 류승룡은 자신 역시 양정숙 역이 탐났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여배우였다면 정말 너무너무 하고 싶었을 거예요. 모든 걸 다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캐릭터인데 이걸 표현해 내기가 사실 너무 힘들거든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도 나는 캐릭터죠. 그런데 임수정 씨가 연기하는 걸 보고 제 욕심이 쏙 들어갔어요. 난 저렇게 할 자신이 없다(웃음)!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고, 너무나도 대단한 배우입니다. 13년 전에도 훌륭했지만, 지금 다시 만나 보니 그동안의 연륜과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고이 안고 더욱 잘 표출하는 배우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줄어들고, 안방극장에서조차 시청률 1%의 벽도 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작품들마저 생겨나는 요즘 배우들의 설 자리 역시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무대부터 TV, 스크린, 그리고 OTT까지 섭렵하며 콘텐츠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선배로서 류승룡은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자연스러운 논리에 의한 것”이라면서도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 잘되는 게 맞지만, 한편으론 씁쓸하죠. 일단 저는 정말 감사하게도 작품들이 쉬지 않고 들어오고 있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저 역시도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었어요. 요즘 드는 생각은 양질의 서사가 있는 좋은 작품을 계속 개발해서 내놓는다면 대중들이 알아봐 주실 거라는 거예요. 어떤 작품을 볼 때 기시감이 있다면 관객이나 시청자들은 ‘에이, 어딜 속여’라고 거부감을 느끼거든요. 조금이라도 게으르게, 얕은 수로 다가가면 철저히 외면 받을 수밖에 없죠. 반대로 정말 공들여서 잘 만들면 따뜻하게 반응해주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 어떤 작품이든 더욱 진실되게 잘 만들어야 하는 거겠죠.”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