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제명과 미국행 과정 중요한 시점마다 팔꿈치 통증이 발목 잡아…“아마추어 육성에 남은 시간 보낼 것”

“겉은 멀쩡해 보여도 몸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돌발성 난청으로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린다. 공황장애에다 대인기피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계속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
백차승은 선수 생활하는 동안 세 차례의 팔꿈치 수술을 경험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많은 공을 던지고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한 이유가 포함됐겠지만 난청이나 공황장애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다.
야구가 좋아서 선수가 됐고, 부산고 ‘천재 투수’로 이름을 날린 덕분에 시애틀 매리너스와 129만 달러에 계약을 맺은 뒤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지만 백차승은 미국으로 향하기 전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이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고3 때 겪은 일이 야구 인생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백차승은 부산고의 에이스였다. 전국대회가 열리면 매 경기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당시 경남고의 송승준, 경남상고의 김사율과 함께 라이벌을 이루며 부산 고교 야구의 흥행을 이끌었다. 백차승은 빼어난 실력 덕분에 1998년 9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1998년 9월 12일 대만과의 준결승전이었다. 이날도 선발 등판한 백차승은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팔꿈치 통증이 심해지는 걸 느낀다. 중요한 경기라 통증을 참고 던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닝을 거듭할수록 피안타가 늘어났고, 실점이 생겼다. 4-3으로 앞서고 있던 5회, 자신이 계속 마운드에 있다가는 자칫 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 상태를 체크하러 나온 감독에게 교체를 부탁했다. 당시 감독은 백차승에게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대신 1루 수비를 맡으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백차승은 송구조차 어려운 상태라고 대답했고, 이후 더그아웃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는 대표팀이 대만에 역전패를 당했고,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을 꺾고 우승을 목표로 했던 대표팀으로선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다음 날 신문에는 백차승이 대만전에서 자진 강판했고, 태업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보도됐다. 당시 고3이었던 백차승은 시애틀 매리너스 입단을 앞두고 있던 상태였는데 대만전 패배를 백차승의 미국행과 연결 지었다. 백차승이 시애틀 입단을 위해 몸을 아끼려고 대만전에서 자진 강판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백차승은 대한야구협회의 상벌위원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때는 내가 왜 상벌위원회에 참석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내가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상벌위원회에 나가보니 거기 계신 분들이 신문 기사를 보여주며 미국 가려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전에서 공을 더 안 던진 거냐고 물어보셨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지만 결과는 무기한 자격정지, 즉 영구 제명이었다.”
백차승은 자신이 영구 제명되었다는 사실을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 탑승 때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고 한다. 그때 동행했던 백차승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뛰어라”라고 조언했다. 그 말이 백차승한테는 더 이상 한국에서는 야구를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전달됐다.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된 뒤 2008년 빅리그에서 6승을 거두는 등 미국 진출 후 가장 좋은 시즌을 보냈지만 또 다시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에 돌입했고, 이듬해인 2009년 10월 웨이버 공시로 팀을 나오게 된다. 이후 백차승은 미국 독립야구팀과 일본 오릭스 버팔로즈, 일본 독립야구팀, 치바 롯데 마린즈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 백차승은 미국과 일본에서 세 차례의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야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소중한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팔꿈치 통증과 수술이 그를 주저 앉혔다.
백차승은 200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98년 시애틀 입단 후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9년 잠시 한국에 나왔다가 여러 차례 비자 발급을 거절당한 영향이 컸다.
“다른 선수들 비자는 쉽게 나왔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대한야구협회 영구 제명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영구 제명된 선수가 미국에 야구하러 간다는 걸 미국 영사가 납득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세 차례 정도 비자가 거절됐다가 시애틀 구단이 나서준 덕분에 어렵게 비자를 발급 받았다. 이후 7년 동안 한국에 오지 못했다. 한국 들어가면 다시 미국으로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병역기피자가 됐지만 군대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미국 국적을 선택한 것이다.”
백차승은 2009년 WBC 대표팀 후보 선수 명단에 포함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표팀을 맡은 김인식 감독은 백차승이 미국 국적이라 국적 논란으로 큰 부담을 갖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백차승은 김인식 감독의 배려를 외면했다. 그는 “그때 내가 도망갔다”라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리석었다. 그때는 내게 쏠리는 관심과 기자들과의 만남이 엄청난 부담이 됐다. 미국 국적 취득 문제로 비난받고 있던 상태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팀에 합류하게 될 경우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것 같아 용기가 나지 않아 내가 도망갔다. 김인식 감독님께 너무 죄송했다.”
백차승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을 족쇄처럼 옥죈 야구협회의 무기한 자격정지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WBC 대표팀 합류 문제로 우연히 알게 됐다”고 말한다. 2006년 대한야구협회 무기한 자격정지가 해제된 걸 2008년 12월에 확인한 셈이다.
“그 사실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영구 제명이 조금 더 일찍 풀렸다면 내 야구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들이 지금은 후회로 남는 게 많다.”
백차승은 2016년 한국 법무부에 국적 회복 허가 신청을 했고,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한국 국적을 상실했다고 받아 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진행했다가 패소한 바 있다. 당시 백차승은 35세였고, 국적 회복이 받아 들여지면 뒤늦게라도 군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어린 선수는 어느새 45세의 중년으로 변모했다. 돌아보면 아쉬움과 미련만 남는 야구 인생이다. 하지만 더 이상 뒤를 돌아보기엔 앞으로 가야 하는 길이 바쁘다.
백차승은 프로팀 지도자로 돌아가기보다는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의 육성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야구 아카데미뿐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학교가 있으면 돌아다니면서 재능기부를 펼칠 계획도 있다. 한국 야구의 뿌리를 이룰 선수들의 육성, 그게 백차승 야구 인생의 마지막 숙제가 될 듯하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