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리그 챔프전서 ‘평생 라이벌’ 이창호 두 번 꺾어…윤영민 감독 “팀 해체 위기 속 필사의 각오로 임해”
[일요신문] “평생의 앞길을 막아선 거대한 벽, 그 벽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넘어섰다”
효림이 창단 3년 만에 레전드리그 왕좌에 등극했다. 그 중심에는 만년 2인자 최명훈 9단과 야전사령관 서봉수 9단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특히 최명훈은 평생의 라이벌이자 ‘넘사벽’으로 군림해 온 이창호 9단을 상대로 벼랑 끝에서 연승을 거두며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효림 주장 최명훈 9단(왼쪽). 정규리그에서 12승 2패로 이창호 9단(오른쪽)과 공동 다승왕을 차지한 데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이창호 9단을 꺾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지난 12월 9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열린 2025 인크레디웨어 레전드리그 챔피언결정전 최종 3차전에서 효림은 수소도시 완주를 2-0으로 완파했다. 이로써 효림은 종합 전적 2-1을 기록, 짜릿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결승 시리즈는 50세 동갑내기 주장의 맞대결로 시작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효림의 주장 최명훈과 완주의 주장 이창호는 1975년생 친구이자 오랜 경쟁자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혹했다. 최명훈은 이 대회 전까지 이창호 9단에게 통산 11승 35패로 철저하게 눌려 있었다. 전성기 시절 최명훈의 우승 길목을 번번이 막아선 것도, 그를 평생 2인자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한 것도 바로 신산(神算) 이창호였다.
시리즈 초반 분위기는 완주가 주도했다. 지난 3일 열린 1차전에서 이창호는 최명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 승리로 이창호는 스승 조훈현 9단을 넘어 한국 바둑 통산 최다승(1970승) 신기록을 달성하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반면 최명훈은 또다시 이창호 공포증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2차전부터 반전 드라마가 쓰이기 시작했다. 팀이 막판에 몰린 상황에서 2차전 맞대결을 펼친 최명훈은 장장 3시간의 혈투 끝에 이창호를 꺾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지긋지긋한 연패 사슬을 끊어내는 귀중한 승리였다. 그리고 운명의 3차전. 1-1로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드라마의 정점이 찍혔다. 효림의 2지명 서봉수 9단이 완주 권효진 8단을 꺾고 선취점을 올린 가운데, 우승의 향방은 다시 한 번 주장전인 최명훈 대 이창호의 대국으로 좁혀졌다.
통합 우승을 달성한 효림 선수단(왼쪽부터 서봉수 9단, 최명훈 9단, 윤영민 감독, 김일환 9단, 오규철 9단). 사진=한국기원 제공대국 중반까지는 완벽한 이창호의 페이스였다. 이창호는 최명훈의 대마를 맹렬하게 몰아붙였고, 인공지능(AI) 승률 그래프는 이창호의 승리 확률을 99%로 가리키고 있었다. 양 팀 모두 최종 3국을 대비하려는 찰나, 기적이 일어났다. 벼랑 끝에 몰린 최명훈이 1%의 바늘구멍 같은 틈을 파고들어 대마의 절반을 살려내는 묘수를 터뜨린 것이다. 순식간에 형세가 뒤집혔고, 당황한 이창호가 맹추격했으나 승부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최명훈이 208수 만에 백 1집반 승리를 거두며 대역전극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창호라는 거대한 산을 넘은 최명훈은 우승 직후 “몇 차례 착각을 범해 상대가 쉽게 두었다면 지는 바둑이었는데, 상대의 실수가 겹치며 운 좋게 이겼다”며 겸손해하면서도 “내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최명훈 9단의 드라마틱한 활약 뒤에는 또 한 명의 레전드 서봉수 9단의 묵직한 존재감이 있었다. 서봉수는 정규리그에선 7승 7패로 평범했으나 챔피언결정전 1~3차전에 모두 출전해 3전 전승을 기록, 팀 우승의 숨은 주역이 됐다. 최명훈이 라이벌 대결이라는 중압감과 싸우는 동안, 서봉수는 확실한 승점을 챙기며 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사실상 더블 에이스 체제나 다름없는 활약이었다.
효림 윤영민 감독은 “이번에도 우승하지 못하면 팀이 해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속에 필사의 각오로 임했던 것이 주효했다”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이창호의 팀으로 불리며 대회 2연패를 노렸던 수소도시 완주는 정규리그 1위 효림의 기세에 눌려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창호는 개인 통산 최다승 신기록이라는 금자탑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패배와 라이벌 최명훈에게 당한 역전패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이번 2025 레전드리그 챔피언결정전은 바둑 팬들에게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다. 만 50세가 되어 시니어 무대에서 다시 만난 두 기사의 치열한 승부, 그리고 평생의 라이벌을 넘어서며 팀을 구한 최명훈의 서사는 스포츠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선사했다는 평을 들었다.
[승부처 돋보기] 2025 레전드리그 챔피언결정전 3차전 2국
흑 이창호 9단(수소도시 완주) 백 최명훈 9단(효림) 208수 끝, 백1집반승
장면도[장면도] 필살의 흔들기
하변에서 우변으로 이어지는 38개의 초거대 백 대마가 몰살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창호 9단은 흑1로 백 4점을 제압해 백의 항서를 재촉하고 나섰는데, 이때 떨어진 백2가 최명훈 9단의 필살의 흔들기. 여기서 초읽기에 몰린 이 9단은 흑3으로 받았는데, 이게 백의 함정에 걸린 수였다.
실전진행1[실전진행1] 난리가 나다
백이 1로 단수치자 그제야 아차 싶은 이창호. 백3에 흑4 후퇴는 어쩔 수 없다. 흑5면 왼쪽에서 백이 단수치는 수가 있다. 결국 백5로 끊기면서 난리가 났다.
실전진행2[실전진행2] 승부수 성공
흑1로 이었을 때 백2가 좋은 수. 흑3으로 변화의 여지를 줄여 봐도 백4·6으로 흑이 편안하게 백을 제압하는 그림은 사라졌다. 최명훈의 승부수가 성공한 모습이다.
정해도[정해도] 흑, 무탈
애초 백1에 흑이 상대하지 말고 흑2로 몰았으면 무탈했다. 백3·5가 선수지만, 흑10까지 진행에서 보듯 이 수상전은 백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