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감독 리더십·김정은 노련미·박소희 성장 삼박자…반환점 도는 시점 선두 질주

하나은행은 WKBL에서 만년 약체로 불려온 팀이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리그를 지배하던 신세계를 인수하며 2012년 창단했다. 하락세를 걷던 팀이었기에 인수 이후 하나은행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팀의 창단멤버로 고군분투하던 김정은이 2017년 FA자격을 얻자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외로운 에이스' 김정은은 우리은행 이적 직후 꿈에 그리던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반면 하나은행으로선 성장세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2021년 여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리그 최고 슈터 강이슬이 팀을 떠난 것이다. 구단은 강이슬 잔류에 총력을 쏟았으나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시간차를 두고 에이스를 잃는 사이 투자는 없었다. 하나은행은 지속적으로 하위권을 전전했다. 이어지는 스타 유출에 평균 연령이 내려간 선수단은 패기만 가득할 뿐 경험 부족으로 맥 없이 무너졌다.
이들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5-2016시즌, 리그 2위에 올라 창단 최초로 챔피언 결정전 무대까지 밟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계 혼혈 선수로 인정받아 국내 선수로 분류됐던 첼시 리가 출생증명서 등 가족관계 문서를 위조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결국 하나은행의 모든 시즌 기록은 물거품이 됐다. 준우승 기록 박탈, 시즌 전 경기 몰수패, 상금 반환의 징계를 받았다. 구단주와 감독도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해 다음 시즌 드래프트 순번이 최하위로 밀려 전력 보강 요인조차 사라졌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9-2020시즌은 비교적 순항 중이었다. 5할 승률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2강' 우리은행과 KB스타즈를 제외하면 4팀이 근소한 차이로 경쟁을 펼쳤다. 하나은행은 3위 자리를 지키며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바라봤다. 하지만 2020년에 들어서며 코로나19가 발발, 시즌이 중단됐고 결국 재개 없이 조기 종료됐다. 하나은행의 부푼 꿈은 다시 한 번 무너졌다.

만년 하위권 하나은행에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된 것은 2023-2024시즌부터다. 과거의 에이스 김정은이 2년 2억 5000만 원의 조건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돌아온 김정은은 "하나은행은 청춘을 함께한 곳이다. 좋은 선수들이 나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 팀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 마지막 농구 인생을 쏟겠다"는 말을 남겼다. '왕언니'의 합류는 선수단을 단숨에 결집시켰다.
하나은행은 곧장 김정은 영입 효과를 실감했다. 특히 수비에서의 끈끈함이 더해지며 1년 전에 비해 경기당 평균 실점이 9점 가까이 감소(75.0→66.5)했다. 하나은행은 4위로 정규리그를 마쳤고 창단 최초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자신감을 얻은 2024-2025시즌, 하나은행은 FA 시장에서 '큰손'으로 활약하는 등 도약을 노렸으나 오히려 혼란이 더해졌다. 결국 리그 최하위의 성적으로 복귀했다.
절치부심한 이들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이상범 감독을 사령탑에 앉혔다. 남자 농구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KBL 무대에서 챔피언결정전 우승과 정규시즌 우승을 모두 경험했다. 다만 20년이 넘는 지도자 경력에서 여자농구는 처음 경험한다는 점이 변수로 꼽혔다. 그럼에도 KBL 우승 경력자가 WKBL로 향하는 첫 사례였기에 기대감은 높았다. 이 감독의 보좌진에는 이미 국가대표 감독까지 역임한 여자농구의 '전설' 정선민 수석코치가 부임했다.
이에 더해 아시아쿼터 드래프트를 통해 직전 시즌 BNK에 우승을 안기고 MVP 후보로도 꼽혔던 이이지마 사키가 팀에 합류했다. 기존 2년 계약을 마치고 은퇴를 고민하던 김정은도 '1년 더'를 외쳤다.
#꿈 같은 우승을 위하여
이 같은 변화에도 이번 시즌 하나은행의 선전을 예상하는 이는 드물었다. 4강 후보로도 거론되지 않을 정도였다. '국보 센터' 박지수가 해외로 진출했다 1년 만에 복귀한 KB스타즈가 우승후보 1순위로 꼽혔다. 직전 시즌 정상을 두고 다툰 BNK와 우리은행도 여전한 전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하나은행은 예상을 뒤엎고 개막 초반부터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그 개막 이전 '남자팀보다 2~3배 힘들다'며 엄살을 피우던 이상범 감독이 팀을 바꿔놓은 것이다. 양인영과 진안이 동시에 골밑에 서며 혼선이 있었던 지난 시즌과 달리 양인영을 백업으로 돌리며 교통정리를 했다. '공간'을 얻은 진안은 팀을 공수에서 이끈다. 지난 시즌의 부진을 만회하고 있다.
시즌 종료 이후 은퇴를 선언한 리더 김정은은 출전 시간을 줄이고 후반 승부처에 집중하는 '조커'로 활용된다. 과거 이상범 감독이 KBL에서 은퇴를 앞둔 김주성을 활용하던 방식이다. 김정은으로서도 출전 시간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집중력을 높여 경기에 임할 수 있게 됐다. 그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도 이번 시즌 코트에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이외에도 하나은행 돌풍의 중심에는 2023년 신인왕 출신 박소희가 있다. 데뷔 5년 차를 맞아 리그 정상급 슈터 자원으로 성장했다. 출전 시간(29분 33초), 득점(11.8점), 리바운드(3.7개), 어시스트(3.6개) 등 모든 분야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 중이다. 유력한 기량발전상 후보로도 꼽힌다.
특히 박소희의 활약은 14일 BNK와의 원정경기가 백미였다. 3점슛만 5개를 성공시키며 프로 진출 이후 개인 최다인 22득점을 기록했다. 승부를 뒤집는 마지막 결승 3점슛 또한 그의 작품이었다.
리그에서 가장 먼저 두 자릿수 승수에 도달한 하나은행은 어느덧 2위권과 격차를 3경기 이상 벌렸다. 창단 최초 정규리그 우승, 챔피언결정전 진출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현재 페이스로 끝까지 내달린다면 레전드 김정은과의 작별도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수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