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기업 가치 ‘끌올’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재계 신사업 위축, 중소운용사 과도한 행정부담 우려

금감원은 프로세스 점검을 통해 ‘공시의 성실성’을 넘어 ‘의사결정의 실질’을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운용사가 의결권을 행사할 때 어떤 내부 기준을 적용했는지, 해당 안건을 심의하는 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는지, 그리고 계열사나 대형 고객과의 이해상충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현장에서 기능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의미다.
금감원 이번 점검을 통해 외부 자문기관의 의견을 단순히 수용하는 수준을 넘어, 운용사 자체의 투자 방향성이 반영된 세부 기준이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국내 운용사 상당수가 외부 자문기구의 리포트에 의존하며 자체 판단에는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번 프로세스 점검에서 금융당국은 자문기관의 권고를 참고하되, 해당 안건이 실제 펀드 수익률과 주주 가치에 미칠 영향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했는지를 들여다 볼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문 인력 확충과 분석 시스템 고도화라는 업계의 본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번 점검에선 투자위원회나 의결권 위원회가 단순한 통보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이해상충 요소를 배제한 내부 결정 의사 등이 존재했는지를 확인한다. 특히 대주주나 계열사와의 관계가 의결권 행사에 미친 영향력을 방어할 수 있는 내부통제 장치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는지도 확인한다. 금감원은 미흡 사례에 대해 실명을 공개해 시장의 평가를 받게 할 방침이다.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프로세스 중심의 점검이 안착될 경우 기업의 불투명한 의사결정을 견제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실질적인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기관투자자가 명확한 기준에 따라 목소리를 낼 때 기업의 자본 효율성이 증대되고 주주 친화적인 경영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형균 차파트너스 본부장은 “자산운용사가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사용하면 이들 운용사가 투자한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개선될 것”이라면서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 자산운용사들에게 의결권 프로세스는 규제가 아닌 투자자와의 신뢰를 구축하는 핵심 자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미국의 블랙록(BlackRock)은 매년 초 ‘투자 스튜어드십 가이드라인’을 통해 이사회 구성, 임원 보수, 기후 리스크 등 주요 현안에 대한 행사 기준을 상세히 공표한다. 블랙록은 단순히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안건에 반대할 경우 그 구체적인 논거를 담은 ‘투표 사유서’를 즉각 공개함으로써 시장과 기업에 투자 방향성을 전달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는 예측 가능성에 방점을 둔다. 이들은 투자 기업들에 자신들이 중시하는 지배구조 표준을 담은 ‘기대 문서’를 사전에 공유한다. 이는 운용사가 중시하는 가치를 기업 경영진이 미리 인지하고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고도화된 스튜어드십 모델이다. 영국의 영국 다국적 금융 서비스 및 자산운용사 리걸앤제너럴(L&G) 역시 이사회의 독립성이 결여된 기업에 대해 명확한 반대 원칙을 수립하고, 이를 사전에 공표하는 ‘낙선 명단’ 전략을 통해 시장의 규범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미국의 스테이트 스트리트(SSGA)는 다양성 지표 등 구체적인 거버넌스 기준을 수립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내부 프로세스에 따라 엄격한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러한 글로벌 선례들은 의결권 행사가 투명한 프로세스를 거칠 때 비로소 기업 가치를 제고하는 전략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에서는 재계와 중소형 운용업계의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의결권 행사 강화가 경영진의 소송 리스크를 높여 신사업 투자 등 도전적인 경영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중소형 운용사들이 프로세스 기록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행정 부담을 지게 되고, 이것이 실질적인 분석보다는 금감원의 체크리스트를 채우기 위한 서류 양산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500여 곳에 달하는 점검 대상의 편차를 고려한 당국의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존에는 국민연금 등의 기관과의 소통이 절대적이었다면 이제는 중소형 자산운용사와도 소통해야 해 안정적으로 경영 방향을 정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그동안 자본시장의 투명성이 제고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관련 정책이 추진되고 있었다”라면서 “투자자가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에 대한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산운용사가 충실하게 의결권 행사하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