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신경쇠약으로 휴학…“아이비리그에선 휴학 중 자살 빈번”
지난 4일 현지시각으로 오전 3시쯤 미국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에 위치한 자택에서 이래나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2014년 미국의 명문대 예일대 캘훈 칼리지에 입학한 이래나 씨는 이름을 세례명 카트리나에서 따올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4월 9일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남 이선호 씨(26)와 비공개 혼례를 올렸다.
여느 재벌가와 달리 소박한 결혼식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됐다. 결혼식은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CJ 인재원 식당에서 열렸는데 인재원에는 따로 웨딩홀이 마련돼 있어 CJ그룹 직원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양가 부모님의 결혼 축하문이 전부였던 결혼식은 10여 명만 참석해 이들의 앞길을 축복했다.
2010년 스위스 유학 시절 당시 이래나 씨 모습. 사진출처=이래나 씨 프레지
지난 2014년 이래나 씨는 아버지이자 그룹 코리아나 멤버였던 이용규 씨와 함께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예일대 합격 소식을 알렸다. 연예계에 관심이 많았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학업에 열중했다는 어린 시절 이야기와 더불어 클라라의 사촌으로 유명세를 탔다. CJ그룹이 최순실의 측근으로 알려진 차은택과 사업을 진행했다는 의혹에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이래나 씨의 비보로 회사 분위기는 더 뒤숭숭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래나 씨의 사인을 두고 여러 의견이 회자됐다. <일요신문>이 뉴 헤이븐 경찰에 확인한 결과 범죄와 관련 없는 사망으로 드러났다. 보통 미국 경찰 당국은 자연사나 병사,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는다. 살인사건 등의 범죄와 연관된 사망이 아닌 만큼 자연사나 병사, 내지는 자살 등으로 사인은 압축된다. 이에 대해 CJ그룹 관계자는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이래나 씨의 사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상태지만 예일대 안에서는 극단적 선택으로 보는 이들이 대다수다. 미국 현지 한인 학생 등에 따르면 이래나 씨는 신경쇠약 등의 문제로 지난해 휴학했다고 알려졌다. 예일대 재학생 사이에서 이래나 씨의 사망 전 상황이 퍼지며 재학생 대부분은 이 씨 사망 5일 전에 세상을 떠난 예일대생 헤일 로스(20)의 사인과 같은 시선으로 이 씨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예일대 재학생 헤일 로스 역시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며 지난해 휴학한 뒤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경찰과 학교 당국은 실제 헤일 로스의 사인 역시 이래나 씨의 죽음과 함께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헤일 로스의 한 친구가 “헤일 로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미 2014년 겨울에도 시도한 적 있다”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했고 결국 휴학했지만 학교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이런 정신적 고통에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학교 게시판에서 밝혀 눈길을 끌었었다.
이래나 씨 사망을 기점으로 재학생 대다수가 또 다시 예일대를 포함 아이비 리그 소속 명문대의 어려운 휴학과 복학 절차를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최근 MIT에서도 MIT 부속 정신과 치료시설에서 치료를 받던 휴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발생했다. 휴학 중 사망은 미국 명문대 사이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후문이다. 예일대 한 재학생은 “입학하면 쏟아지는 과제와 압박에 우울증이나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지만 학교를 다니면서는 제대로 된 정신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휴학 제도는 한국과 달리 까다로운 편이다. 휴학과 복학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중퇴로 처리한 뒤 재입학으로 보는 게 맞다는 시각이다. 다수의 재학생은 “휴학한다는 말만 꺼내도 경쟁과 압박을 버틸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는 게 아이비 리그의 현실”이라고 말할 정도다. 휴학을 신청하면 이듬해 다시 입학 신청을 해야하고 면접 등 까다로운 절차가 뒤따른다. 불합격 가능성도 높다.
재학생이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와 부적응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늘자 몇몇 대학에서는 내부 규정을 완화한 바 있다. 예일대는 지난 4월 휴학과 복학이 힘들다는 이유로 유서를 남긴 채 지난해 1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루창 왕(여·당시 20세) 사건이 비화되자 정신건강 문제로 휴학할 경우 복학이 보장되도록 학칙을 바꿨다. 하지만 일부 재학생은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며 학교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한 재학생은 “정신과에서 정신병 확진을 받아야만 가능하고 그 외 낮은 수준의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휴학이 어렵다. 예일대를 버티는 자체가 큰 스트레스다. 이따금 지칠 때 어떻게든 휴학을 해서 마음의 안정을 좀 찾더라도 복학 승인을 받으려면 ‘휴학 기간 동안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했냐’는 식의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복학하면 왜 대체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한 학기를 의무적으로 재적응 기간을 가져야 하니 결국 동급생과는 3학기나 멀어지게 된다”며 학교 측의 개혁을 촉구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낙후된 정신건강 프로그램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예일대의 정신건강 기관은 늘 사람들로 꽉 차 제대로 된 상담이 어려운 상태라고 알려졌다. 하버드대학교나 MIT, 코넬대학교 등 아이비 리그의 아시아 학생들의 자살률은 미국의 평균보다 2배 이상 높은 상태다.
예일대 여자 펜싱팀. 사진출처=이래나 씨 프레지
아직 이래나 씨의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헤일 로스 등 아이비 리그 소속 명문대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과 이래나 씨의 사인을 직접적으로 연관지을 순 없다. 다만 한국에서도 미국 아이비 리그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입학했지만 이후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와 부적응으로 힘들어하는 그들의 현실이 새삼 눈길을 끈다.
한편, 이래나 씨의 시신은 17일쯤 국내로 운구될 전망이다. CJ 그룹 내부에서는 장례절차 등에 대해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