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자들 ‘일베성향’ 의혹 단체에 지원 요청 밝혀지자 지지자들 대거 돌아서
텀블벅 등 각종 창작 후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페미니즘 콘텐츠를 가리켜 비꼬는 말이다. 여성 인권 관련 콘텐츠는 넘쳐나도 그 반대를 검색하면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이처럼 ‘여성 인권’은 후원할 수 있고 ‘남성 인권’은 후원할 수 없는 사회적 부조리를 타파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탄생했다는 것이 바로 ‘90년생 김지훈’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미러링한 소설 ‘90년생 김지훈’의 표지. 사진=크라우디
‘메갈리아(메르스+이갈리아(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허구의 여존남비 국가)의 합성어)’와 ‘페미니즘’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남성들에게는 속시원한 한 방이 될 수도 있었다. 초반 ‘90년생 김지훈’이 이슈몰이를 한 것도 남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보니 당초 목표금액이었던 300만 원을 훨씬 넘어선 1043만 원 상당이 모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90년생 김지훈’의 제작자 가운데 한 명의 신상이 밝혀지면서 그의 지지자들이 대거 돌아서는 촌극이 벌어졌다. 더욱이 제작자들이 극우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로부터 파생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던 ‘안티 페미협회’에게 홍보와 지원을 요청해왔다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논란에 휩싸였다. 펀딩에 참여하려 했던 남성들은 “페미니스트에 대항한다고 해서 일베와는 손을 잡을 수 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요신문’은 ‘90년생 김지훈’의 제작자 가운데 한 명이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유명한 만화가 ‘카광’이라는 제보를 받고 그와 연락을 시도했다. 카광은 2016년 이른바 ‘혼밥 티셔츠’로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 목표금액 40만 원에서 2500만 원 이상을 끌어 모아 화제를 일으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이 펀딩에 대해 카광은 “혼자 밥 먹는 것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자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티셔츠에 “혼자 밥 먹는 찐따입니다. 수치스러우니 제발 쳐다보지 말아주세요”라는 문구를 박아 풍자적 재미를 더했다. 1차 성공 후 2차 펀딩에서는 목표금액 500만 원에서 일주일 만에 2000만 원을 돌파, 최종 금액 4000만 원을 달성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2016년 카광이 ‘메갈리아4’의 티셔츠 텀블벅에 대항해 제작한 ‘혼밥티’. 우측 티셔츠에 ‘혼갈리안’이라고 메갈리안4(메갈리아4 이용자)를 풍자한 문구가 적혀있다. 사진=디시인사이드
이처럼 이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그가 이름을 숨기고 ‘90년생 김지훈’ 제작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많은 이들이 그 속내에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앞선 ‘혼밥 티셔츠’는 카광이 당초 주장한 목적과는 달리, 같은 시기 문제가 됐던 메갈리아의 ‘여성 혐오 피해자 법률 지원’을 위한 티셔츠 제작 펀딩을 풍자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던 터였다. 그랬기에 단순히 티셔츠가 가진 풍자적 재미보다 메갈리아에 대항했다는 것에 더 큰 흥미를 보인 후원이 이어졌다. 이처럼 이미 먼저 ‘안티 페미니즘’ 마케팅으로 재미를 봤던 그가 ‘82년생 김지영’의 패러디 소설로 사적 이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따랐다. 다만, 제작자 측은 수익을 기부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단순한 사적 이득만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견고한 지지층이 됐어야 할 남성들마저 ‘90년생 김지훈’의 펀딩에 등을 돌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카광, 또는 최소한 ‘90년생 김지훈’의 제작자 가운데 한 명이 안티 페미니즘 커뮤니티에 직접 홍보글을 올려왔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지난 3월 28일 ‘90년생 김지훈’의 저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네티즌은 안티 페미니즘 커뮤니티 ‘안티 페미협회’ 측에 프로젝트 펀딩에 동참할 수 있는 인터넷 주소를 올리고 홍보, 참여를 당부했다.
‘안티 페미협회’는 극우사이트인 일베와 유사한 양상을 보여왔다. 반정부 정서로 일베의 성향을 옹호하는가 하면, 안티 페미협회가 참가했던 ‘페미니즘·미투 운동’ 반대 집회에는 일베 회원들이 동참하기도 했다. ‘90년생 김지훈’의 펀딩에 안티 페미협회 회원들도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약속했다.
지난 3월 31일 미투 운동 반대, 페미니즘 척결, 문재인 대통령 퇴진 시위를 벌였던 안티페미협회. 사진=안티페미협회
저자로 추정되는 카광의 신상까지 공개되면서 펀딩의 목적에 의혹이 지속 제기되는 가운데, 지지층인 남성 진영에서조차 “아무리 페미니즘과 메갈리아를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일베와 함께할 수는 없다”는 강한 비판이 이어졌다. 여기에 제작자들에게는 ‘일베충(일베 이용자를 가리키는 비하 단어)’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결국 3월 30일 1차적으로 펀딩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날 제작자 측은 “3월 29일 저녁 네이버 쪽지로 제 신상정보와 함께 염산 쇼핑몰 링크가 왔다”며 페미니스트로 추정되는 집단으로부터 협박 쪽지를 다수 받았음을 알려왔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남성들로부터 ‘일베충’이라고 불리는 것에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일베몰이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라며 펀딩 프로젝트를 중단, 결제를 모두 취소 처리하고 환불하겠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입장을 바꿔 이튿날 또 다시 프로젝트를 재개했다. “남성인권에 대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이렇게 무산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며 이후 프로젝트가 나오기 위한 좋은 선례로 남고 싶다는 것이 재개 이유였다. 이로써 4월 3일 기준으로 최종 달성률에 346%를 넘어선 1040여 만 원으로 최종 후원이 달성됐다.
그런데 정작 당일 오후 11시경 ‘90년생 김지훈’ 제작자 측은 또 다시 입장을 바꿔 펀딩을 전면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작자 측은 6일 오전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남성 진영으로부터 신상털이를 당하고, 여성 진영으로부터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라며 펀딩 중단 이유를 뒤늦게나마 설명했다.
한편 익명을 요구한 한 크라우드 펀딩 관계자는 “2014년 이후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게는 액세서리나 에코백부터 크게는 도서, 음반 등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를 겨냥한 펀딩이 많이 증가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남성 제작자들도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상품을 제작해 판매한 뒤 자신의 SNS에 구매 여성들을 비웃는 글을 썼다가 논란을 일으켜 판매가 전면 중단된 적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