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넥슨·스마일게이트서 잇단 ‘탄생’…장시간 노동 근절되지 않는데 정책은 오락가락
스마일게이트 노조 ‘SG길드’ 홈페이지 캡처
IT·게임업체들이 잇달아 노조를 설립하는 까닭은 업계 종사자들의 과도한 근무와 ‘혹사’를 더는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 정부 정책이 오락가락하고 불분명해지면서 업계 종사자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됐다.
IT·게임업계 노동자들이 가장 문제 삼는 부분은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에도 근절되지 않는 장시간 노동과 과로다. 게임·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신작 출시와 마감을 앞두고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하는 ‘크런치모드’가 대표적이다. 직원을 ‘갈아 넣을’ 정도로 혹사시킨다는 뜻으로 국내 한 게임업체에서 신작 출시를 앞두고 야·특근에 시달리던 직원이 과로사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게임업계 한 직원은 “크런치모드가 3개월이 넘도록 이어지는 등 사실상 초과근무가 일상”이라며 “업계에 계속 노조가 생겨나 이 같은 일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크런치모드가 여전한 가장 큰 이유로 포괄임금제를 꼽는다. 포괄임금제 탓에 야근과 주말 출근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넥슨노조와 스마일게이트노조는 “회사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높아지지 않았다”며 “포괄임금제로 공짜야근과 주말 출근이 강요됐다”고 강조했다. 앞서 네이버노조 또한 노동조합 설립 선언문을 통해 “회사의 엄청난 성장에도 불구하고 복지는 뒷걸음질 치며, 포괄임금제와 책임근무제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정당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포괄임금제는 시간외근로에 대한 수당을 급여에 포함시켜 일괄 지급하는 임금제도를 뜻한다. 근로계약 체결 시 근로형태나 업무 성질상 법정기준 근로시간을 초과한 연장·야간·휴일근무 등이 당연히 예정돼 있는 경우나 계산의 편의를 위해 노사 당사자간 약정으로 연장·야간·휴일근무 등을 미리 정한 후 매월 일정액의 제수당을 기본임금에 포함해 지급하는 방식이다.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일부 업종에 제한적으로 인정돼야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악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산업의 특성’을 이유로 대부분 업체에서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는 IT업계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서버다운’, ‘해킹’ 등 24시간 관리감독이 필요한 업종 특성을 고려해 포괄임금제를 적용하지만, 실제로는 게임이나 프로그램 개발 시기에 연일 이어지는 야특근에 포괄임금제가 악용되는 것이다. 한 IT업체 직원은 “게임업계에 ‘크런치모드’가 있다면 IT업계에는 ‘등대’ ‘오징어배’가 있다”며 “야근이 심해 하루 종일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의미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혹사’가 대체휴가 등의 방식으로 보상을 받는다면 그나마 형편이 낫다. 하지만 소규모 영세업체가 대부분인 업계에서는 바라기 힘든 현실이다. 앞의 직원은 “좋은 기업은 야근수당이 별도로 없는 대신 대체휴가 등을 제공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하다”고 하소연했다.
정부도 포괄임금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주52시간 근로 확립과 포괄임금제를 규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시행했지만 포괄임금제 규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 역시 지난 5월 ‘개정 근로기준법 설명자료’를 발표하면서 “포괄임금제 오남용을 방지하고 실근로시간에 상응하는 보상원칙이 확립되도록 지도지침을 마련 중”이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개선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축제와 포괄임금제는 실질적인 관계는 없다”면서도 “현재 연구용역 등을 진행하고 있으나 개선방안 발표될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 IT업계에서는 ‘근로자 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무제한 연장근로가 가능한’ 근로시간 특례업종 범위 확대 문제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김동연 부총리는 지난 6월 26일 경제현안간담회에서 “불가피한 경우 특별연장근로를 인가받아 활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겠다”며 “특히 ICT업종은 서버다운, 해킹 등 긴급 장애대응 업무도 특별연장근로가 가능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네이버 노조는 성명을 통해 “IT 노동자들의 현실을 도외시한 처사로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 의지와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며 “노동시간 단축에 역행하는 특별연장근로 가능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역시 지난 8월 2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집중근로를 하는 일부 업종, 또 일반 제조업에서도 특정 기간에 주문이 쇄도하면서 불가피하게 연장근무가 필요할 때 인정해야 한다는 김 경제부총리의 생각과 같다”고 말하면서 정부 생각을 재확인시켜줬다.
IT업계에 노조 설립 바람이 부는 까닭도 이 같은 정부 입장과 무관치 않다. 차상준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지회장은 “ICT업계나 게임업계는 산업이 발전하면서 오히려 근로자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며 “정권이 바뀌면 정책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기보다 노조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행동키로 했다”고 강조했다.
IT·게임업계 종사자들은 노조 설립이 이어지는 업계 분위기를 환영하고 있다. IT업체 다른 직원은 “회사가 직원들에게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한다면 재정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질 정도라는 점은 알고 있다”며 “우리는 주52시간 근무라는 여유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 업계에서 주52시간 근무 도입도 무의미하다. 다만 사람처럼 일하고 싶을 뿐이며 노조의 역할에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IT·게임업계 노조 별칭도 색다르네 네이버와 넥슨,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IT·게임업계답게 신선하고 색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네이버 노조의 이름은 ‘공동성명’이다. ‘함께 행동해 신뢰받고 공정한 네이버를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넥슨의 노조 ‘스타팅포인트’는 게임업계 노동자 권리를 찾는 시작점이 될 것이란 의지가 담겼다. 넥슨 노조는 “게임업계 1호 노조로서 크런치모드를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모드로 바꿀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게임업 특성을 살려 이름을 ‘SG길드’로 정했다. 길드란 온라인게임 플레이어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함께 모여 행동한다는 뜻을 게이머들에게도 익숙한 단어를 사용해 전달하고자 ‘길드’를 사용했다”고 전했다. SG길드는 설립선언문을 통해 “게임산업 노동자의 노동권을 지켜나갈 SG길드와 함께 비상식의 벽을 레이드하자”고 강조했다. 레이드 역시 게임용어로 다수의 플레이어가 모여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는 것을 뜻한다. 네이버와 넥슨,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모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소속이다. 민주노총 아래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인 IT노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섬식품노조를 택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현 IT노조의 경우 KT 근로자 위주인 데다 규모 또한 크지 않기 때문이다. 세 기업 노조는 “회사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노조 설립이 처음이라 전문성을 갖추고 헌신해줄 수 있는 곳을 찾았다”며 “정의당 비상구의 도움을 받아 화섬식품노조를 소개받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어 노조 설립 파트너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