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판결이라고 하지만 당시 판결문조차 없어” 판단 근거 부족하단 지적
하지만 법원 내부에서는 ‘웅성거림’이 적지 않다. 당시 여순 사건이 정당한 과정의 재판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상식적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를 70여 년이 지난 지금 법원에서 다시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대법원이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비판부터, “사법의 판단이 정치의 판단에 휩쓸렸다. 망했다”는 자조 섞인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당시 반란군에 점령됐던 전남 여수와 순천을 탈환한 국군이 수백 명에 달하는 민간인에게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씌워 불법 체포한 뒤 구체적인 범죄 증명도 없이 유죄 판결을 내린 후 곧바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의혹을 두고 다시 재판이 열린다. 71년 만에 사건의 실체가 다시 드러날지 관심이 쏠린다.
# 대법 “당시 적법 절차 없이 처벌, 증언도 부합”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3월 21일, 여순 사건 당시 내란 및 국권문란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 아무개 씨 등 3명의 재심 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재심개시를 결정한 원심 결정을 확정했다.
당시 순천 시민이었던 장 씨 등은 1948년 10월 국군이 반란군으로부터 순천을 탈환한 직후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그리고 체포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선고 직후 사형을 당했다.
여순사건 여수유족회의 합동 위령제와 추모식 당시 모습. 연합뉴스
대법원 재판부는 “당시 군과 경찰이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고 민간인에 대해 체포나 감금 등을 무차별적으로 했음이 명백하고, 당시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일치한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한 원심은 옳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어떤 절차로 수사를 받았고 재판 과정에 입증된 증거는 무엇이었는지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군사법원은 당시 판결문도 남겨놓지 않아 어떻게 반란군에 협조했는지, 그 증거 자료가 무엇인지 지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 정치권은 환영, 다른 사건들도 ‘들썩’
여순 사건이 재조명된 것은 정치적인 흐름에서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여순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군과 경찰이 438명의 순천지역 민간인을 내란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장 씨 유족 등이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심인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순천 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 등에 비춰보면 장 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재심을 받아들였다. 검찰은 항고했지만 2심 법원도 유족의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 역시 검찰의 재항고까지 가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재심 개시를 최종 결정했다.
지방 정치권은 환영의 뜻을 밝혔다. 김영록 전라남도지사는 3월 22일 여순 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대법원의 첫 재심 결정에 대해 환영 성명을 내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과 아픔을 안고 살아오신 유가족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늦었지만 재심 결정을 계기로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도 영향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인천시의회 민주당 의원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피해를 본 월미도 주민이나 상속인에게 보상금 지급 내용의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위원회가 120여 년 전 동학농민운동 참가자 명예회복을 위한 유족등록사업을 재개하는 등, 과거 역사에 대한 재평가 및 보상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 법조계 “재심하기엔 새로운 증거물 없어”
법원 내 일부의 조심스런 의견이지만, 이번 여순 사건 재심 결정을 놓고 ‘재심까지 해야 할 사건은 아니’라는 지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과정에 문제가 있는’ 사건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재심을 하기에는 사유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법원 고위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9 대 4의 의견으로 재심을 하라는 것은, 그냥 무죄를 주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며 “상식 수준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하는 것과 재심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고성준 기자.
통상 재심은 명백하게 사실에 반하는 증거 등이 확보됐을 때, 유죄를 무죄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증거가 새롭게 등장했을 때 해야 한다. 재심이란 유죄를 선고한 원판결의 근거가 된 증거가 허위라는 사실이 확정판결로 증명됐을 때 이를 바로잡는 제도로, 형사소송법에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 여순 사건은 그런 ‘핵심 증거’가 없다는 비판이다. 실제 71년 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주 4·3사건 진압 파병명령을 받은 군부대 내부 남로당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 대한 탈환 과정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은 수사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재판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른 고위직 판사 역시 “판결문도 없는 사건이지 않냐.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앞선 판단의 근거를 문제 삼고 새로운 판결(무죄)을 할 수 있겠냐”고 비판했다. 그는 심지어 “위원회에서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냈다고 하지만 이는 의견일 뿐 당시 유죄를 판단한 근거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22일 만에 이뤄진 과정을 문제 삼아 무죄로 하겠냐’”며 “이런 기조라면 6·25 전쟁 중에 있었던 즉결 심판 등도 다 재심을 해야 할 기세”라고 지적했다.
사법부의 판단들이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 관계자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보상을 한다고 하지 않나. 앞선 역사를 지우기 위해서 정부는 물론 사법부도 동참하는 것 같다”며 “지금 같은 흐름으로는 조만간 단군 시절에 대한 판단도 새롭게 할 기세”라고 비꼬기도 했다. 앞선 익명의 법원 관계자 역시 ‘최근 법원이 정치화되는 것 같다’라는 지적에 대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수사 협조 때부터 망한 지 오래”라고 자조 섞인 반응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검찰 출신의 대형 로펌 관계자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영장을 기각하면서 법원 영장전담판사가 ‘탄핵의 특수성을 고려했다’는 문장을 보고 법원인지 정치를 고려하는 조직인지 의심했다”며 “언제부터 법원이 ‘정치 상황’까지 대놓고 감안했냐. 사법부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갈수록 낮아지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