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가 가장 피하고 싶은 볼넷…류현진 父 “볼넷 주느니 안타를 맞아라”
지난 16일, LG 선발 임찬규의 제구가 흔들리며 ‘참사’가 시작됐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올 시즌 메이저리그를 평정하고 있는 LA 다저스 류현진은 여러 차례 “야구를 처음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볼넷을 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는 게 낫다’고 배웠다”는 말을 했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그 말은 아들 류현진이 어느 팀의 어느 타자를 상대하든 공격적인 피칭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실제로 류현진은 KBO 리그 시절부터 볼넷이 적은 투수로 유명했다. 빅 리그에서 가장 감탄하는 류현진의 피칭 내용 가운데 하나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볼넷 대비 삼진’ 비율이다. 일반적으로 타자는 ‘삼진 대비 볼넷’ 수가 높을수록 좋은 타자로 평가받고, 투수는 ‘볼넷 대비 삼진’ 수가 높을수록 좋은 투수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만큼 볼넷은 투수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적이자 불안 요소다.
#한 이닝 볼넷 6개가 만들어낸 참사
최근 LG는 바로 이 볼넷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하나 썼다. 6월 16일 두산과의 잠실 맞대결에서 2회 한 이닝에만 4사구 8개를 내주며 와르르 무너진 탓이다. 1994년 6월 24일 한화가 전주 쌍방울전 1회에 4사구 8개를 기록한 지 25년 만에 KBO 리그 역대 한 이닝 최다 4사구 타이 기록이 나왔다.
2회말이 시작되지 전까지 LG는 3-0으로 앞서 있었다. 하지만 LG 오른손 선발 임찬규의 제구가 급격하게 흔들리면서 사달이 났다. 임찬규는 첫 타자 박건우에게 볼넷을 허용하더니 오재일에게는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다. 다음 타자 박세혁이 초구에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해 무사 만루가 됐고, 임찬규가 김재호 타석에서 등 뒤로 날아가는 폭투를 던져 첫 실점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무사 2·3루에서는 김재호에게 다시 볼넷을 허용해 또 다시 만루를 만들었다. 류중일 LG 감독은 임찬규가 2회들어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볼넷 3개와 몸에 맞는 볼 1개를 연속 허용하자 결국 선발 투수 조기 교체를 단행했다.
하지만 무사 만루라는 위기 상황에서 급히 마운드에 오른 LG 왼손 투수 임지섭도 좀처럼 공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첫 타자 류지혁에게 볼넷을 내줘 결국 밀어내기 점수를 허용했다. 다음 타자 정수빈을 1루 땅볼로 유도해 홈에서 주자를 잡아냈지만, 이어진 1사 만루에서 다시 호세 페르난데스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던졌다.
악몽은 2사 후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됐다. 임지섭은 이어진 만루에서 김재환에게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을 던졌고, 다음 타자 박건우에게 또 밀어내기 볼넷을 내줬다. 2회들어 여섯 번째로 나온 볼넷이었다. 결국 세 번째 투수 김대현이 투입되고 오재일을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야 두산의 2회 공격이 끝났다. LG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답답할 수 없는 한 이닝이 종료됐다.
이날 경기에선 한 이닝 최다 4사구뿐 아니라 또 다른 각종 진기록도 탄생했다. 2회에만 두산 타자 11명이 타석에 들어서면서 안타 없이 타자일순한 역대 최초 사례로 남았다. 또 두산은 안타를 하나도 치지 않고 5점을 가져가면서 KBO 리그 역대 한 이닝 무안타 최다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쌍방울이 1996년 7월 26일 OB전에서 얻어낸 4점. 상대 팀 투수들의 난조 덕에 힘 한 번 들이지 않고 큰 발자취 하나를 남겼다. 2회를 포함해 한 경기 4사구 12개를 허용한 LG는 이래저래 단단히 자존심을 구겼다.
#볼넷의 기원과 악영향
볼넷은 투수가 가장 비효율적으로 출루를 허용하는 방법인 동시에 타자에게는 힘 한 번 쓰지 않고 걸어 나갈 수 있는 최고의 ‘안전 진루권’이다. 타격을 하지 않고 출루하기 때문에 타수에서 제외되고 타율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타자의 선구안이 반영되는 기록이기도 하지만, ‘투수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지지 못해 타자가 타격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더 많이 해석되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존이 처음 활성화 된 1860년대까지는 볼 4개가 아니라 3개만 골라도 걸어서 1루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 타석당 타자의 스윙 기회를 총 세 번으로 제한하되 투수는 타자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져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그 후 타자들이 일부러 공을 치지 않고 경기를 지연시키는 현상이 발생하자 1858년 처음으로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이어 1863년에는 투수들이 일부러 스트라이크존 밖으로 공을 던지는 신경전을 방지하기 위해 마침내 ‘볼로 판정된 공이 일정 개수를 넘어가면 타자를 1루로 보낸다’는 룰이 도입됐다. 메이저리그에서 볼넷 용어에 숫자 ‘4’를 포함시키지 않고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라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최초의 기준이던 볼 3개가 투수들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1871년 파격적으로 출루 기준을 9개까지 늘렸지만, 이번엔 출루까지 너무 많은 공이 필요해 경기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결국 1880년 8개→1882년 7개→1884년 6개→1886년 7개→1887년 5개 순으로 차례로 볼 수가 줄어들었고, 1989년부터 4개로 정착됐다. 초창기 야구의 숱한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최적의 숫자가 ‘볼다섯’이나 ‘볼셋’이 아닌 ‘볼넷’인 셈이다.
투수 열 중 아홉은 ‘선두타자 볼넷’을 가장 꺼린다. 주자가 등 뒤에 있으면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기 어려워지고, 이 타자를 막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볼카운트 3B-1S는 투수들이 가장 홈런이나 안타를 많이 맞는 카운트로 꼽히는데, 볼넷을 피하려는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한가운데로 공을 던지다 실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또 볼넷이 많아지다 보면 투수의 투구 수가 늘어나면서 포수와 야수들의 수비 시간도 늘어나게 되고, 결국 타격 집중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뛰어난 볼넷 대비 삼진 비율을 자랑하는 류현진은 “볼넷을 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는 게 낫다고 배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연합뉴스
지금까지 많은 투수가 수많은 볼넷 때문에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 역대 한 시즌 최다 볼넷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투수는 2001년 SK에서 뛴 외국인 투수 페르난도 에르난데스다.
한 시즌 동안 무려 134개 볼넷을 허용했고, 19년이 흐른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몸에 맞은 공까지 포함한 최다 4사구 기록 역시 같은 해 148개로 에르난데스가 보유하고 있다. 에르난데스는 그해 34경기에 나서 233⅔이닝을 던지면서 14승 13패 평균자책점 3.89를 기록한 수준급 외국인 투수였다. 투구 이닝 1위와 다승 3위에 올랐고 탈삼진(215개)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하지만 제구가 좋지 않아 기복이 심한 게 늘 단점으로 꼽혔다. 워낙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한편 경기 평균 투구 수가 122개에 달할 정도로 공도 많이 던져 일관된 컨디션 유지가 어려웠다는 평가도 있다. 에르난데스는 이듬해 재계약에 성공해 2001년보다 안정적인 피칭을 하면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미국 시절부터 이어진 과도한 투구로 탈이 나 시즌 도중 어깨 부상으로 방출됐다.
역대 한 경기 최다 볼넷을 내준 투수는 내로라하는 KBO 리그 레전드인 삼성 김시진이다. 1984년 9월 4일 대구 해태전에서 9이닝을 완투하면서 볼넷 11개를 내줬다. 투수 분업화가 본격화되기 전이라 가능했던 기록이다. 김시진은 롯데 이적 후인 1989년 4월 14일 사직 OB전에서도 또 다시 볼넷 11개를 내줘 자신의 역대 최다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연장 14회까지 홀로 경기를 책임졌기에 어느 누구도 볼넷 11개를 놓고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연속 타자 볼넷 기록은 ‘5명’이 가장 많다. 빙그레 손문곤(1986년) 현대 전준호(2005년) LG 심수창(2007년) SK 전병두(2008년) 롯데 김대우(2009년) LG 임찬규(2011년) 한화 김용주(2015년) 삼성 정인욱(2016년)까지 총 7명의 투수가 5명의 타자에게 연속 볼넷을 내줬다. 다만 대부분 연속 볼넷을 내주고 교체된 뒤 다음 등판을 다시 볼넷으로 시작한 경우다. 불펜 투수로 뛰면서 3~4경기에 걸쳐 기록이 이어진 투수들도 있다. 이 가운데 실제 한 경기에서 다섯 타자를 연속으로 내보낸 투수는 김대우가 유일하다. 2009년 4월 25일 사직 LG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1회에만 다섯 타자를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는 불명예를 안았다. 김대우는 이후 어깨에 통증을 느끼다 이듬해 타자로 전향했고, 2017년 다시 투수로 돌아오는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다.
하지만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김대우도 한 이닝 최다 볼넷 허용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롯데 김영수가 2001년 8월 18일 광주 KIA전에서 1회에만 볼넷 6개를 내주면서 19년째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넥센 강윤구가 2013년 6월 6일 목동 삼성전 5회에만 4사구 6개를 내줬지만, 볼넷 5개에 몸에 맞은 공 1개가 포함돼 있다. 순수 볼넷 기록만으로는 김영수가 여전히 최다다.
반대로 볼넷과 관련해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긴 투수도 있다. 빙그레 이상군은 1986년 6월 8일 OB와의 잠실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부터 한 달 뒤인 7월 8일 잠실 OB전까지 단 한 번도 볼넷을 내주지 않아 49이닝 연속 무볼넷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현역 시절 이상군에게 ‘컴퓨터 제구’나 ‘컨트롤의 마법사’와 같은 별명이 따라 다녔던 비결이다. 이상군은 그해 무4사구 완투승을 일곱 번이나 해내 이 부문 한 시즌 최다 기록도 여전히 갖고 있다.
키움 신재영은 프로 1군에 데뷔한 2016년 4월 6일 대전 한화전부터 4월 29일 고척 SK전까지 30⅔이닝을 무볼넷으로 막고 역대 데뷔전 이후 연속이닝 무볼넷 신기록을 작성했다. 이전까지는 2011년 롯데 외국인 투수 브라이언 코리가 20이닝 연속 무볼넷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5년 뒤 신재영이 그 숫자를 10이닝 넘게 늘렸다. 신재영은 그해 정교한 제구력을 앞세워 15승 고지를 밟았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표를 얻어 신인왕에 올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찬반 논란 일었던 ‘자동 고의4구’…시즌 중반 현장 반응은? 지난해부터 KBO 리그에는 앞으로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기록 하나가 생겼다. 바로 ‘고의4구 폭투’다. 오랫동안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 골머리를 앓아온 KBO가 메이저리그와 일본에서 이미 시행됐던 ‘자동 고의4구’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포수가 일어서서 공을 받아야 하는 형식적 절차를 없애고, 한 팀 감독이 고의4구 의사를 밝히는 수신호를 보내면 투수가 투구를 하지 않고 타자를 1루로 보낼 수 있는 룰이 새로 생겼다. 전 세계 야구계가 ‘스피드 업’이라는 화두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자동 고의4구 도입 전까지는 찬반 양론이 팽팽했다. 반대하는 쪽은 “야구의 묘미를 잃게 된다”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포수가 선 채로 투수의 공을 받는 동안, 타석과 대기타석의 두 타자가 서로 다른 표정과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도 야구라는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 변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2루나 3루에 주자가 있을 때 고의4구를 선택하기 때문에 자칫 투수와 포수의 호흡이 맞지 않아 공이 뒤로 빠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실점과 연결되거나 경기의 흐름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는다. 축구의 페널티킥처럼, 웬만해서는 실수를 하지 않지만 같은 이유로 실패했을 때 심리적 부담이 더 큰 게 바로 고의4구였다. 하지만 이미 자동 고의4구는 국제 야구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경기 도중 고의4구를 직접 던져야 하는 투수들이 절대적인 찬성 의사를 표현했다. 한 에이스급 투수는 “고의4구는 스트라이크 존에 던지는 것과는 밸런스가 다르다. 고의4구 다음에는 병살타나 중요한 타자와 승부를 염두에 둬야 한다”며 “고의4구를 던지다 갑자기 세게 던지면 밸런스에 문제가 생긴다. 선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밸런스에 민감한 스타일이라 개인적으로 긍정적”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야구의 정통성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기로 유명한 일본 야구계가 신속하게 자동 고의4구를 받아들인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이 자동 고의4구를 규칙에 추가하면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대회에서도 이 룰을 정식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입 2년째를 맞이한 자동 고의4구는 이제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규칙처럼 자연스럽게 KBO 리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동 고의4구 도입이 경기 시간 단축에 실제로 큰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주장도 종종 나왔지만, 현장에서는 “주자를 고의로 내보내야 하는 투수와 포수의 부담이 크게 줄어든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며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