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수 ‘무투구 끝내기 보크’로 화제…까다로운 규정에 때론 심판도 실수
‘현역 최다승’ 베테랑 투수 배영수의 끝내기 보크가 최근 큰 화제가 됐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최근 KBO 리그에서 가장 주목 받은 장면은 두산 배영수의 ‘무투구 끝내기 보크’였다. 팀의 명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허무한 실수가 나왔다는 점도 화제였지만, 그 실수의 주체가 현역 최다승 투수인 베테랑 배영수라는 점이 더 놀라웠다.
상황은 지난 9월 14일 두산과 SK의 인천 맞대결에서 벌어졌다. 1위 SK를 맹추격하던 두산은 6-4로 맞선 채 9회말을 시작했다. SK와 격차를 2.5경기 차까지 좁히고 남은 두 번의 맞대결과 잔여 경기에서 정규시즌 역전 우승까지 노려 볼 기회였다. 이때 마무리 투수 이형범이 연속 안타를 맞고 6-6 동점을 허용하면서 불길한 기운이 흘렀다. 1사 1·3루 위기가 계속되자 두산 벤치는 부랴부랴 이형범을 내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투수 배영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러나 배영수는 첫 타자 노수광에게 첫 공을 던지기도 전에 1루에 있던 주자 정현을 견제하는 동작을 취하다가 투수 보크 판정을 받았다. 3루 주자 김강민의 끝내기 득점을 허용하는 뼈아픈 실책. 끝내기 보크는 역대 6번밖에 나오지 않은 진기록이고, 그 가운데 공 한 개도 던지지 않은 끝내기 보크는 이번이 처음이다.
내야수들이 병살 플레이를 위해 전진 수비 태세를 갖춘 상태였지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경기 종료가 선언됐다. 배영수가 “분명히 투수판에서 발을 뺐다”고 억울해 하며 펄쩍 뛰고 반발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산은 그렇게 다시 한 번 1위에서 멀어졌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보크 판별
보크는 투수들의 ‘반칙 행위’다. 베이스 위에 주자가 있을 때만 성립되고, 투수의 보크가 선언되면 모든 주자가 한 베이스씩 진루한다. 3루에 주자가 있다면 실점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 김강민도 그렇게 끝내기 득점을 올렸다.
이 때문에 보크는 투수가 상대 타자나 주자를 속이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여겨진다. 웬만한 야구팬이라면 다 아는 규칙이 보크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잡아낼 수는 없다. 수많은 야구 규칙 가운데서도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보크도 있지만, 신체의 일부분만 보크의 경계선에 놓이는 미세한 동작들도 종종 발견된다.
심지어 보크를 선언당한 투수가 문제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도 있고, 심판들조차 보크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갈 때도 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는 작은 움직임 하나에 보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집계가 나온 적은 없어도, 심판들은 평균적으로 20%가량의 보크를 놓친다는 속설이 있다. 그만큼 판정이 힘들다. 한 야구인은 “일반인들 눈에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과 코치들, 선수들마저도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보크를 적발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귀띔했다.
물론 배영수의 끝내기 보크는 애매한 상황이라 보기 어렵다. 심판 네 명이 동시에 보크를 선언한 것은 물론이고, 3루에 있던 정수성 SK 코치와 주자 김강민까지 손을 들어 배영수의 보크를 지적했다. 김풍기 KBO 심판위원장도 “배영수는 투수판에 중심발을 댄 채로 송구하는 동작만 취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보크”라고 단언했다.
처음에는 항의했던 배영수 역시 하루 뒤 잠실구장에서 취재진과 만나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부끄럽고 참담한 내 실수”라며 “변명의 여지 없이 보크가 확실하다. 1루 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그런 실수가 나왔다”고 고개를 숙였다.
#어렵고 까다로운 보크 규정
KBO 야구규칙에는 무려 13가지 보크 항목이 지정돼 있다. 투수들이 지적 받는 보크 동작이 매번 비슷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복잡하고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조항들을 상세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투수판에 중심발(오른손 투수는 오른발, 왼손 투수는 왼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투구와 관련된 동작을 시작했다가 투구를 중지했을 때. 즉, 와인드업을 시작한 뒤 타자에게 투구하지 않으면 보크라는 뜻이다. △투수판에 중심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1루에 송구하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공을 던지지 않았을 때. 2루주자와 3루주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1루주자와 타자에게는 일단 송구 동작이 시작된 뒤 취소할 수 없다. △투수판을 딛고 있는 투수가 베이스에 송구하기 전에 발을 똑바로 그 베이스 쪽으로 내딛지 않았을 때. 외국인 투수들이 종종 1루 견제를 할 때 자유발(오른손 투수는 왼발, 왼손 투수는 오른발)을 홈과 1루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내딛어 지적을 받곤 했다. △투수판에 중심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주자가 없는 베이스에 송구하거나 송구하는 시늉을 했을 때. 플레이에 필요한 상황(1루주자가 도루를 시도할 때 2루에 던지는 것 등)을 제외하면 모두 보크다. △투수가 반칙투구를 했을 때. 타자가 타석 안에서 충분한 자세를 갖추기 전에 투구하면 보크가 선언돼 주자가 진루하고, 주자가 없을 경우 보크가 성립하지 않기에 스트라이크가 들어와도 무조건 볼이다.
이뿐만 아니다. △투수가 타자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투구했을 때 △투수가 투수판을 밟지 않고 투구와 관련된 동작을 취했을 때 △투수가 불필요한 이유로 경기를 지연했을 때 △투수가 공을 소지하지 않은 채로 투수판을 밟거나 걸쳐 섰을 때, 또는 투수판에서 떨어져 투구에 관련된 동작을 했을 때 △투수판에 중심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공을 떨어뜨렸을 때 △고의4구를 진행하고 있는 투수가 포수석 밖에 나가 있는 포수에게 투구했을 때 △투수가 세트포지션으로 투구하면서 완전히 정지하지 않고 투구했을 때도 모두 보크로 분류된다.
#1루 견제 보크가 가장 많은 이유
보크 판정 때 가장 논란이 많이 일어나는 사례는 단연 1루 견제 시 투수가 주자를 기만하는 행위다. 1루 견제에 관련된 보크를 판정할 때, 기본이 되는 기준은 ‘투수판’이다. 투수판에서 발을 뺀 투수는 한 명의 야수로 간주된다. 견제구를 던지는 시늉을 하다 말아도 상관이 없고, 반드시 베이스 쪽으로 자유발을 딛고 공을 던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투수판을 밟는 순간부터 투수는 투구와 그 이외의 동작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심지어 투수판을 밟은 상태에서는 상대 팀이나 심판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애매한 동작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2012년 삼성과 2015년 한화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미치 탈보트는 투수판을 밟고 서 있다가 마치 투구 동작을 시작하는 것처럼 양쪽 무릎을 한 번 움찔한 뒤 1루로 몸을 틀어 견제구를 던지는 습관으로 논란을 빚었다. 상대 팀 감독들이 끊임없이 항의했고 삼성 시절에는 세 차례, 한화 시절에는 두 차례나 같은 이유로 보크를 지적 받았다. 급기야 한번은 글러브를 심판에게 던지면서 보크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한 야구인은 이 같은 상황과 관련해 “보크의 여지가 있는 동작은 처음부터 신경 써서 하지 않는 게 좋다. 한번 보크를 지적 받으면, 이후에는 투수가 고쳐야 한다”며 “심판들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한번 보크를 선언한 동작에 대해서는 다음 경기에서도 보크로 지적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보크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당하는 탈보트. 사진=연합뉴스
물론 분명히 투수판에서 발을 뺐는데도 보크가 선언될 때가 있다. 투수판에서 내려올 때는 반드시 뒤쪽, 즉 2루 방향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베테랑 심판위원은 “일부 오른손 투수들은 1루 견제 동작을 빠르게 하기 위해 3루 쪽으로 중심발을 빼면서 견제하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며 “이 경우 투수판 뒤쪽으로 발을 뺀 게 아니기 때문에 투수판을 밟고 있는 것과 똑같이 간주돼 보크가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투수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배영수의 상황처럼 ‘분명히 투수판에서 발을 뺐는데 왜 보크냐’고 항의하는 상황이 종종 나오는 이유다.
#보크도 하나의 기술이다
노련한 베테랑 투수들은 가끔 심판의 눈을 피해 의도적으로 보크 동작을 하기도 한다. 주로 발 빠른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을 때 이뤄진다. 주자가 스타트를 끊고 달리기 시작하면 심판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주자 쪽으로 쏠리는데,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걸리지 않는’ 보크를 범하는 것이다. 세트포지션에서 확실한 정지동작 없이 투구하는 ‘퀵 피치’가 가장 많이 시도되는 방법. 게다가 견제아웃을 잘 잡아내기로 이름난 투수들은 대부분 ‘훌륭한 견제’와 ‘애매한 보크’의 경계선을 잘 넘나들기에 심판들도 모든 동작을 다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심판들은 보크 판정을 위해 어느 부분을 가장 유심히 볼까. 투수별로 다르지만 주요 포인트는 무릎, 손, 어깨, 글러브 위치 등이다. 특히 무릎은 가장 신경 써서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왼손 투수가 1루 견제를 할 때 자유발이 벌어지는 각도는 일반적으로 45도에서 60도까지 허용된다. 견제에 능한 왼손 투수들은 홈플레이트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는 듯하다가 곧바로 1루 쪽으로 공을 던지는 기술을 구사한다. 이 때문에 무릎 쪽의 세밀한 움직임을 유심히 봐야 보크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또 현역 시절 견제도 잘하고 그만큼 보크도 많았던 한 왼손 투수는 빠른 주자가 나갔을 때 세트포지션 동작에 돌입하는 것처럼 글러브를 내리는 듯하다가 완전히 정지하지 않고 1루로 견제구를 던지는 일이 잦았다. 베테랑 심판들은 칼같이 잡아냈지만, 연차가 높지 않은 심판들은 어김없이 속아 넘어갔다는 후문이다.
견제 능력으로 유명한 투수들은 대부분 좌완이지만, 많은 심판들은 ‘국보’로 불렸던 오른손 투수 선동열이 이 분야에서도 역대 최고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선동열의 보크를 판단하는 포인트는 왼쪽 어깨였다. 심판위원장 출신의 한 야구인은 “일반적으로 오른손 투수가 왼쪽 어깨를 안쪽으로 집어넣으면 정상적으로 투구를 시작하겠다는 의미인데, 선동열은 이 동작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1루로 공을 던졌다”며 “보크성인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워낙 동작이 빨라 잡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보크 유도 홈스틸과 희대의 오심, 그리고 나비효과 2011년 6월 8일. LG와 한화가 맞붙은 잠실구장에서 보크와 연관된 희대의 오심이 나왔다. 심판 네 명만 보크를 발견하지 못해 벌어진 불상사. 아직도 보크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회자되곤 하는 사건이다. 한화가 5-6으로 딱 한 점 뒤진 9회 초 2사 3루 이대수 타석. 풀카운트에서 한화 3루주자 정원석이 느닷없이 홈을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기습적인 홈스틸 시도였다. 마운드에 있던 LG 투수 임찬규는 중심발을 투수판에 대고 자유발을 뒤로 뺀 채 투구 자세에 돌입한 상태였다. 무조건 투구 동작을 이어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허를 찔린 임찬규는 당황한 나머지 투구 동작을 멈추고 투수판에서 발을 뗐다. 그리고 포수 조인성에게 ‘투구’가 아닌 ‘송구’를 했다. 야구 규칙에는 ‘중심발을 투수판에 대고 있는 투수가 투구 동작을 하다 갑작스럽게 중지하면 보크가 선언돼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그 순간 주심이 조인성에게 태그된 정원석을 향해 힘차게 아웃을 선언했다. 투수를 바라보면서 달려왔던 정원석은 그 누구보다 임찬규의 보크 장면을 확실하게 목격한 인물. 당연히 억울해 하며 펄쩍 뛰어 올랐다. 당시 한화 사령탑이었던 한대화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도 달려와 격한 항의를 시작했다. 세이프라는 주장이 아니라, 보크가 명백하니 3루 주자의 득점이 인정돼야 한다는 항의였다. 만약 정상적으로 보크가 선언됐다면, 정원석이 자동으로 홈을 밟으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었다. 경기의 흐름 역시 한화 쪽으로 돌아선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 오심 하나로 경기가 그대로 종료됐다. 이른바 ‘끝내기 오심’이었다. 보크는 주심을 비롯한 네 명의 심판 중 누구라도 선언할 수 있지만, 네 명 중 그 누구도 임찬규의 보크를 보지 못한 게 문제였다. 심판들도 화면을 확인한 뒤 뒤늦게 “오심이 맞다. 한 감독에게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번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뒤집을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경기를 마감해야 했던 한화는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 이 1패의 아쉬움을 더 크게 절감해야 했다. LG와 한화는 그해 133경기에서 정확하게 59승 2무 82패를 기록해 동률을 이뤘다. 공동 6위. 하지만 한화가 LG 상대 전적에서 근소하게 뒤져 사실상의 7위로 받아들여졌다. 이 경기에서 만약 승리했다면? 한화는 2011년의 단독 6위로 기록됐을 것이다. 이때 오심의 혜택을 봤던 LG는 공교롭게도 3년 후인 2014년 4월 29일 마산 NC전에서 다시 비슷한 해프닝에 휘말렸다. 다만 상황이 정반대였다. 당시 심판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던 LG가 오히려 당시의 한화처럼 보크를 유도하는 홈스틸을 시도했다. LG가 2-3으로 한 점 뒤진 9회초 2사 만루 최경철 타석. 풀카운트에서 NC 마무리 투수 김진성이 공을 던졌고, 최경철이 그 공을 타격해 우익수 플라이로 경기가 끝났다. 그런데 그 모든 상황과 동시에 LG 3루주자 박용근이 갑자기 홈으로 파고들었다. 박용근의 발에 걸려 최경철이 넘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도 연출됐다. 타자와 포수가 모두 타구를 눈으로 쫓느라 주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자가 타격을 할 때 홈으로 슬라이딩하는 주자.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다음날 이 상황을 담은 영상이 외신에서까지 화제에 올랐을 정도다.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이 홈스틸은 상대 투수의 보크를 유도하기 위한 시도였다. 한번 허를 찔렸던 LG가 그 아이디어를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박용근은 “캠프 때부터 준비했던 플레이였다. 타자 볼카운트가 불리해져서 한 점을 꼭 뽑기 위해 보크를 유도하기로 했다”며 “풀카운트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시야에 뛰어 들어가는 주자가 보이면, 보크를 범하거나 적어도 볼을 던질 가능성이 높다고 팀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