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개시 여부 결정 위한 마지막 심문기일…재판부 “가급적 빠른 결정 내릴 것”
스물여덟 번의 겨울 문턱을 밟는 동안 달라진 게 한 가지 있다. 과거 “우리가 하지 않았다”는 2인조의 말을 외면했던 법원이 이번엔 다시 재판 받게 해달라는 요청에 귀를 기울였다.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을 법정에 불러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는 마지막 판단만을 남겨두고 있다.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마지막 심문기일이 지난 11월 14일 부산고법에서 열렸다. 과거 사건이 발생한 낙동강변 앞에 선 재심청구인 장동익 씨(왼쪽)과 최인철 씨(오른쪽). 사진=탐사보도 전문 매체 셜록 제공
모든 국민의 관심이 대입 수학능력시험에 쏠려있던 지난 11월 14일 오후 3시,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개시 여부 판단을 위한 마지막 심문기일이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김문관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렸다. 심문기일은 재심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절차다. 보통 서면으로 이뤄지지만 필요한 경우 법원은 별도의 심문기일을 열어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고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낙동강변 살인 사건은 1990년 1월 부산 사상구 엄궁동 낙동강 갈대숲에서 두개골이 함몰된 여성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덩치 큰 남자 한 명, 작은 남자 한 명”이라는 목격자 진술 외에 별다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대규모 수사본부까지 차렸지만 범인을 끝내 찾지 못했다.
미제로 남는 듯했지만 사건 발생 1년 10개월 뒤 부산 사하경찰서는 장동익, 최인철 씨를 용의자로 지목해 이들로부터 범행 자백을 받았고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경찰 수사 결과에 따라 이들을 재판에 넘겼고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장 씨와 최 씨는 21년간 복역하다가 2013년 모범수로 특별 감형돼 출소했다. 경찰 수사단계부터 출소 이후까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해온 두 사람은 “경찰의 고문 폭행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며 2017년 5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을 재조사한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지난 4월 17일 장 씨와 최 씨가 1991년 사하경찰서 경찰관 4명으로부터 물고문과 폭행 등을 당해 허위자백 했다고 판단했고 검찰은 경찰의 수사 결과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7차례 심문기일, 증언대 선 과거 경찰들은 ‘모른다’고 했다
이번이 7번째 심문기일이었다. 일반 형사사건 재심에서 일곱 차례에 걸친 심문기일이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검찰은 재심이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내려진 사건을 뒤집는 일인 만큼 신중하고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재판부도 첫 심문기일에서 “재심 청구인들이 이번 재판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제라도 제대로 된 재판을 통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취지로 알고 있다. 향후 재판 과정에서는 법과 원칙에 맞는 재판을 하는데 중점을 맞추겠다”며 “다만 당시 경찰관의 직무상 고문, 가혹 행위 등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돼야 한다. 이들을 불러 증언을 듣고 재심 여부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가 공언한 대로 과거 고문 폭행으로 허위자백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당시 경찰관들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장 씨와 최 씨가 지목한 ‘고문 경찰관’은 총 5명. 당시 막내 경찰관부터 수사 책임자였던 형사 과장 등이다. 이들은 증인 출석을 거부하거나 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강제구인(피고인이나 증인을 신문하기 위한 법원의 강제 처분. 소환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만 영장에 의해 집행)까지 언급되자 4명이 법정에 섰다.
이들은 과거 경력부터 그동안 자신들이 해결한 굵직한 사건들을 또렷이 기억했다. 유독 낙동강 살인사건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고문 폭행은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나머지 한 명은 건강 악화로 증인 출석이 불가능했다. 재판부가 출장 재판도 검토했으나 증언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려 최종 무산됐다.
심문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과거 수사 경찰관 4명은 모두 낙동강변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고문한 적 없다고 증언했다. 부산 사하경찰서 앞에 선 장동익 씨(왼쪽)와 최인철 씨(오른쪽). 사진=탐사보도전문매체 셜록 제공.
낙동강변 사건을 재조사한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 소속 현직 검사도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이 재심 청구 검찰 과거사위원회 재조사 대상 사건에 올랐고, 조사 결과에 따라 최종 결론까지 내려졌던 만큼 위원회의 판단 내용이 재심에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어서다.
과거사위원회는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 인권 침해 및 검찰권 남용 의혹이 있었던 사건들을 조사하고, 반성과 재발방지 등을 약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다만 법령이 아닌 훈령으로 시작된 만큼 한계가 지적됐다. 강제조사권이 없어서 자료 제출이나 조사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거나, 과거사위와 진상조사단의 내부 의견 대립 등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번 심문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진상조사단 소속 현직 검사는 낙동강변 살인사건 조사 과정과 내용을 증언했다. 어떤 방법으로 검증했고, 결론을 내릴 때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법정에서 나온 그의 증언을 모두 종합해 보면,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 검찰과 변호인단 ‘신중한 판단’의 간극
이날 심문기일에서 검찰은 최종의견에서 재판부가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 검찰은 “재심은 예외적인 비상 구제 절차”라며 “이를 손쉽게 인정하면 형사재판의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재심을 제4심으로서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판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재심 청구인과 변호인은 당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 경찰관이 고문, 가혹행위 등 직무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재심 사유를 밝혔다. 그러나 형사소송법(420조 7호)에선 ‘직무상 범죄를 범했다는 것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됐을 때’로 제한하고 있다”며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을 경우 다른 방법으로 증명할 길을 열어두고 있으나(형사소송법 422조), 그 사실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만큼 적극적으로 증명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대해 별도의 의견을 밝혔다. 검찰은 “검찰 과거사위원회 조사, 심의 결과는 존중한다”며 “다만 그 전에 검찰 과거사 조사 결과가 법률상 높은 증명력을 가진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에 “청구인 측에서 제출한 여러 증거, 제반 사정, 법정에서 나온 증언, 증인들의 진술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전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최종변론에서 결과도 정의로워야 하지만 과정도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박준영 변호사는 최종 변론에서 어떻게 증거를 수집하고 검증했는지, 사건이 담고 있는 의미 등을 직접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 JTBC ‘스포트라이트’와 일요신문 등 신문사와 방송사가 직접 발로 뛰며 증거를 수집했다. 사건에 관계된 관계자들을 모두 만났으며 전문가 검증을 받았다”며 “엄격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위해 이들이 수집한 증거와 감정에 더해 직접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 원장과 의사 협회, 학계 등을 통해 전문가들로부터 감정서를 받고 추가로 실험과 검증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사위원회 조사 대상 사건으로 올라가기 전 이미 상당히 많은 증거가 수집돼 있었다”며 “과거사위원회가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수사기관에 소속된 현직 검사가 주도적으로 조사했다. 또 위원회와 조사단 관계자들이 공적인 위치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심의, 결론을 내렸다는 점을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30년 전 사건이다”라며 “정말 억울하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 정상이다. 이 사건이 그랬다. 재심청구인 최인철은 수감 시절 밖에 서신을 보내고 때로는 경찰을 고소해가면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계속 주장했다. 감옥에서 계속 편지 쓰고 일기 쓰면서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른 재심청구인 장동익은 어머니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여러 국가기관을 찾아다니면서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때 국가기관이 받았던 진정서를 법정에 모두 제출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각장애가 있는 장동익은 조서에 어떻게 쓰였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서에 서명 날인했고, 최인철은 고문 때문에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했다. 서명 날인했다는 이유로 본인들이 자백한 것으로 규정됐고 그걸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법정에서 해명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결과도 정의로워야 하지만 그 과정도 정의로워야 한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 달라”고 덧붙였다.
최인철 씨는 최후 진술에서 “손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호소했다. 사진=탐사보도전문매체 셜록 제공
또 다른 변호인인 신윤경 변호사는 최종변론에서 “먼저 이 자리가 있도록 해준 재판부에 감사한다”며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지만, 변화된 사법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해 재심청구인들도 재판부에 감사하고 있을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신속한 결정을 요청했다. 신 변호사는 “현재 다른 재심 청구 사건을 맡고 있다. 그 사건의 재심청구인은 40년 동안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가족들에 해가 되고, 잘못되는 일이 생길까봐 주변 종교인의 오랜 시간 설득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며 “그런데 재심 청구를 결정하고 나서 청구서는 접수했는지, 언제 어떻게 진행할지 하루가 멀다하고 물어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40년이 지났는데, 한두 달 못 기다리냐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다. 희망이 없을 때는 몰라도 구제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이는 순간 그 전과는 비교도 못하는 간절함과 초조함이 오게 된다. 낙동강변 살인사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달라”고 말했다.
#“손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할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재심청구인 최인철 씨와 장동익 씨는 최후 진술에서 재판부에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최 씨는 며칠 동안 고쳐가며 쓴 글을 차분히 읽으며 “경찰들은 폭력과 고문을 행하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었다. 폭력에 의해 답했던 ‘네’라는 한 마디가 지금까지도 후회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자 악마였고, 재판 과정에서 외쳤던 저의 억울함과 주장들은 모두 배제됐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말은 그저 책 속의 말이라는 심정으로 21년간 옥살이를 했다”며 “이제는 손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할아버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렸다.
장동익 씨는 최후 진술에서 ”저희를 마지막으로 더는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사진=탐사보도전문매체 셜록 제공
장동익 씨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뉴스를 자주 듣는다. 1990년 당시에는 경찰의 가혹행위도 있었지만 지금은 투명한 세상이 됐다. 투명한 세상에서는 진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한다”며 “거짓은 결코 진실을 덮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를 마지막으로 더는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은 보통 별도의 기일은 열지 않고 법원이 결정만 고지한다. 재판부는 “재판 성격상 신중한 검토가 불가피하지만 가급적 빠른 결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관심이 집중된 사건인 만큼 올해 안에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최 씨와 장 씨의 변호인은 재판부에 “다른 재심 사건인 삼례3인조 사건 등 결정 고지일을 미리 알려주거나 기일을 열어 개시 여부를 밝힌 전례가 있다”며 “어떤 판단을 내리든 날짜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선례가 있다는 점을 참고해 고려해보겠다”고 답변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전문] 김예원 변호사의 최종변론 낙동강변 살인사건 변호인단 가운데 한 명인 김예원 변호사는 시각장애 당사자다. 장애 인권과 관련된 변호를 하고 있다. 시각장애를 가진 장동익 씨를 대리하고 있다. 그는 이날 장 씨를 중심으로 최종 변론을 했다. 다음은 그가 법정에서 한 최종변론 전문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시각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애인권 일을 하면서 피고인 장동익을 알게 되어 이 재심청구 사건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피고인 장동익이 일상생활 속에서 눈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운지에 대해서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이 재판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사회가 장동익과 같은 시각 장애인을 어떻게 배제해 왔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 의료 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나머지 한쪽 눈이 보여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아직도 제 얼굴을 보며 깜짝 놀라는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피고인 장동익은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중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신경위축이라는 질병은 현대의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장동익과 같이 어릴 때부터 시력을 잃은 사람의 원만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과의 좋은 상호 작용입니다. 그 장애인의 특성, 기분, 동선을 아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시각장애로 겪게 되는 많은 불편과 어려움을 상당부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 장동익은 이 사건에 휘말리기 전만 해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님의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있었고 태어난 지 18개월이 된 딸이 있었습니다. 길을 갈 때 전봇대에 부딪히려고 하면 옆에서 손을 끌어 부딪히지 않게 잡아주는 사람, 밥상을 마주하면 젓가락을 잡아 툭툭 치며 여기는 김치 여기는 장아찌가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피고인 장동익이 잃은 것은 단순한 평판이나 시간이 아닙니다. 장애인으로서의 불편한 삶을 지탱하고 이어 나갈 수 있게 해 준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1990년 재심청구인 장동익 씨의 모습. 1년 뒤 그는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구속된다. 사진=탐사보도전문매체 셜록 제공 장동익의 어머니는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장동익은 부산에서 진주교도소까지 5년을 왕복 7시간 매주 찾아오는 아내에게 언제 나갈지 기약이 없으니 재가 하라고 하며 편지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습니다. 딸은 할머니의 손에 컸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따뜻하게 손을 맞잡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출소한 아빠가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출소 후 10평 남짓한 집에 홀로 살고 있는 피고인 장동익은 이 모든 생활의 불편함을 혼자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1991년 11월 8일 밤 통닭이 되어 물고문을 당해야 했던 장동익은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압니다. 그리고 더불어 이 법정에 나와서 증언을 했던 형사들도 자신이 한 짓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 본인이 진행했던 구체적인 사건들, 이송경위, 사건의 내용,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 막힘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시신경위축으로 우안 0.04, 좌안 0.02. 검사 자체가 불가능, 교정 불능으로 렌즈도 도움 안 됨. 밝은 곳에서도 극히 가까운 물체만 구별. 3~4m만 떨어져도 물체를 구분하지 못함.” 이 내용은 피고인 장동익이 항소심 재판을 받을 때 재판부의 제출되었던 의사의 감정서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피고인 장동익이 밝은 곳 아래 가까이에 있는 물체를 제외하고는 시력이 없다는 것, 어두운 곳에서는 스스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피고인들이 이 사건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고인이 장동익은 어머니께서 유물처럼 남겨주신 저 기록 속에 담겨 있는 진실과 억울함을 가지고 이 사건 재심청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피고인에게 부디 속히 재심을 개시하는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강도살인의 전과자가 아닌 떳떳한 시민으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문상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