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문계 인위적 물갈이 비토 기류 확산…‘86·중진·호남’ 스탠스도 관전 포인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사진=박은숙 기자
더불어민주당에서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힌 인사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제외하면, 대체로 비문재인계와 초선, 수도권 의원에 집중됐다.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철희 표창원 의원은 초선이다. 이미 입각한 중진인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서울 용산구)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서울 구로을)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경기 고양정)과 재선인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경기 고양병)은 수도권에 지역구를 뒀다.
입각 후보자로 거론되는 원혜영 의원(경기 부천오정)도 마찬가지다. 초선인 김성수 이용득 제윤경 최운열 의원 등은 비례대표다. 서형수 의원(경남 양산을)은 PK(부산·울산·경남)다. 당 일각에선 “물갈이 대상은 그대로 남고 혁신을 압박해야 할 개혁파만 떠났다”는 비판이 나온다. ‘친문계·86그룹·중진·호남’은 빼고 수도권과 초선 개혁파만 콕 집어 불출마를 했거나 고민 중이라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 복심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과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냈던 백원우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친문계·86그룹·중진·호남’의 요지부동이 여권발 인적 쇄신의 효과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친문계 내부에선 인위적인 물갈이에 대한 불가론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구친문계인 양 원장과 백 부원장, 신친문계인 임 전 실장이 각각 총선 불출마를 택하면서 인적 쇄신의 불씨는 살린 게 아니냐는 안도감도 엿보인다. 임 전 실장 이후 차기 공천을 준비하던 청와대 참모진 일부는 출마 의사를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임종석 효과’다. 다만 당 주류를 흔들 만큼의 인적 쇄신이 분출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 관계자는 “(친문계에 대한) 인위적인 물갈이만이 총선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친문계 중진 의원은 “인위적 물갈이는 필요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당 주류에선 인적 쇄신 미명하에 벌어질 ‘보이지 않은 손’에 대한 우려도 크다. 지난번 20대 총선 당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벌어진 친노무현계 공천 학살을 재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읽힌다. 김종인 비대위는 이해찬 대표를 비롯해 친노 원로그룹인 문희상 국회의장과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등에게 낙천 칼날을 휘둘렀다. 노영민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과 신기남 정청래 김현 윤후덕 전 의원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재성 의원은 불출마를 택했다. 범주류였던 정세균계의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과 전병헌 오영식 전 의원 등도 공천에서 배제됐다.
‘차르 리더십’을 앞세운 김종인 비대위에 대한 당 주류 반발은 총선 직전까지 극에 달했지만, 최종 결과는 민주당(127석·20대 총선 기준) 승리로 마무리됐다. 정치권의 다른 관계자는 “총선 승리의 방정식이 누구를 영입하느냐보다 누구를 걸러내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잘라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공천 국면에서 친문계가 ‘표적 낙천 대상자’로 전락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원조 친문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3철(전해철·양정철·이호철)은 당 주요직을 꿰차거나 총선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문 대통령의 호위무사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등판, 한동안 정국을 뒤흔들었다. 다만 검찰이 PK 친노·친문과 가까운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을 수사, 여권 전반이 초긴장에 빠진 것은 당 주류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김종인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 사진=임준선 기자
친문계를 비켜선 물갈이 유탄은 86그룹으로 향했다. 친문·중진·호남과는 달리, 조직적 반발도 가장 강하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임 전 실장이 86그룹 물갈이의 불씨를 댕겼지만, 이들은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것은 모욕”이라며 격앙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86그룹은 임 전 실장 불출마 선언이 보수 발 인적 쇄신의 신호탄을 쏜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과 다르다고 적극적으로 알리며 방패막이를 쳤다.
실제 김세연 의원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의원 전원사퇴’나 ‘당 해체’ 등 고강도 혁신안을 주문했다. 3선 영남(부산 금정)인 김 의원의 불출마 선언은 자연스럽게 ‘영남 물갈이론’의 불씨를 댕겼다. 이와는 달리, 임 전 의원은 “통일 운동에 매진할 것”이라는 진로 정도만 표명했을 뿐, 당 인적 쇄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86그룹의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임 전 실장이 ‘386들 다 죽자고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며 “용퇴론으로 번져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도 “남아서 일할 사람은 남는 것이고 다른 일을 선택하면 나가는 것”이라고 용퇴론에 선을 그었다.
여권 내부에선 임 전 실장이 이인영 원내대표와 우 의원 등 86그룹의 부담을 덜어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86그룹 선두주자이자 신친문 핵심인 임 전 실장이 자진 퇴장을 선언, 공천 국면마다 제기됐던 운동권 세력의 ‘숙주 정치’ 비판의 싹을 잘랐다는 얘기다. 86그룹의 ‘하청 정치’ 논란은 김종인 비대위 시절 극에 달했다. 당시 오영식 전 의원 등 일부는 공천에서 배제됐다. 임 전 실장이 86그룹의 공간을 만들어줬지만, 이들의 ‘질서 있는 퇴장’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 인적 쇄신의 트리거를 당겼던 이철희 의원은 86그룹을 향해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고 비판했다.
중진 그룹 물갈이도 난제다. 이해찬 대표(7선)를 비롯해 민주당 소속이었던 문희상 국회의장(6선)은 차기 총선에 불출마한다. 원혜영 추미애(이상 5선) 김진표(4선) 의원도 입각 여부에 따라 불출마를 택할 수도 있다. 3선의 백재현 의원도 불출마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 중진은 6선의 정세균 이석현, 5선의 박병석 이종걸, 4선의 강창일 김부겸 김진표 변재일 설훈 송영길 안민석 오제세 이상민 조정식 최재성 의원 등이다. 이중 강창일 의원 등 일부는 불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하위 20%’가 컷오프(예비경선)에서 배제될 경우 현재까지 불출마 의원을 포함, 물갈이 비율이 3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 대표의 ‘시스템 공천’만으로도 중진 물갈이를 단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물갈이의 모양새’다. 중진 의원 자진 용퇴가 아닌 이해찬 호의 인위적 물갈이로 비칠 땐 인적 쇄신 효과는 반감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일부 중진 의원들이 이해찬 지도부에 반기를 들 경우 당 내부 분열은 확전 상태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당 내분이 민주당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중진 물갈이’ 지점이 여당 총선 사수 여부를 판가름할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물갈이 단골메뉴’였던 호남은 친문·86·중진보다는 그나마 상황이 낫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호남(광주·전남·전북) 28석 중 3석만 건졌다. 과거 싹쓸이 때와는 달리, 표적 물갈이에서는 한발 벗어나 있다. 20대 총선 참패가 차기 총선을 준비하는 호남 인사들에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하지만 지역의 터줏대감인 원외 인사들에 대한 물갈이는 딜레마로 작용할 전망이다. 지난 국회에서 호남 지역 의원과 같이 일했던 전직 보좌관은 “호남 지역은 선수와 관계없이 원외 인사라도 ‘고인 물’인 경우가 많다”며 “당에서 낙천된 이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당선권에 근접해 당으로서도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