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노무현·MB·박근혜 정부 추진 모두 무산…현 정부 가덕도 추진 두고 “부산시장 보궐선거용” 비판도
11월 17일 김수삼 김해신공항 검증위원장이 최종보고를 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백지화’라는 단어를 빼놓고 동남권 신공항 프로젝트를 논하긴 어렵다. 1976년 개항한 김해국제공항은 영남권 국내외 수송을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공항 인근 주민들이 느끼는 소음 문제, 고속도로와 산 사이에 껴 있는 입지에 대한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됐다. 군과 함께 사용해야 하는 까닭에 효율성이 좋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1990년대부터 동남권 신공항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1994년 김영삼 정부는 창원 대산 지역에 신공항을 건설하는 안을 채택했지만, IMF 외환위기 등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렇다고 동남권 신공항에 대한 근본적 수요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1976년 개항한 김해국제공항. 사진=연합뉴스
2002년 4월 15일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국국제항공 항공기 추락 사고가 났다. CA129편이 김해국제공항에서 4.3km 거리 돗대산 기슭에 추락해 사망자가 120명 발생한 대형 참사였다. 이 사고로 김해국제공항 안전성 논란이 촉발됐다. 동시에 동남권 신공항 필요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신공항 건립을 추진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동남권 신공항 프로젝트는 중장기 계획으로 옮겨지며 후일을 기약하게 됐다.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동남권 신공항 건립을 내세웠다. 인천국제공항 다음가는 ‘제2 허브공항’을 신설하겠다는 공약이었다. 이때부터 신공항 입지를 둘러싼 경쟁은 밀양과 가덕도, 양자구도로 재편됐다. 그러나 신공항 건립은 영남 내 지역 갈등으로 번지며 보류됐다. 부산광역시와 4개 지자체(경상남도·경상북도·대구광역시·울산광역시)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렸다. 부산은 ‘신공항이 부산에 가까워야 한다’고 했고 4개 지자체는 ‘영남권 전체 수요를 고려해 중간지점에 신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영남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다. 신공항 부지 선정에 있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둘 중 어느 의견을 듣든 영남권 민심을 반으로 갈라야만 했던 까닭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친박 라인’이 대거 득세한 TK(대구·경북)를 등질 수도, 여야 지지율이 혼전세를 보이던 PK(부산·경남)를 등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2011년 3월 30일 이명박 정부는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날 동남권 신공항 프로젝트는 백지화됐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동남권 신공항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8대 대선 과정에서 5개 시·도(경남·경북·부산·대구·울산)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합의를 이뤄져야만 신공항 수요조사에 들어간다는 안을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 임기 중반 지자체간 합의가 이뤄졌다. 2015년 1월 영남권 5개 시·도지사는 정부가 외국 전문기관에 신공항 사전타당성 검토를 의뢰하는 안에 합의했다.
2016년 동남권 신공항 사전 타당성 검토 내용을 최종보고하는 장마리 슈발리에 프랑스 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 수석 엔지니어.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정부는 신공항 사전타당성 검토를 프랑스 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ADPi)에 맡겼다. ADPi는 2016년 6월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사전타당성 검토 최종보고회를 개최했다. 장마리 슈발리에 ADPi 수석 엔지니어의 최종보고 결과는 이변이었다. 슈발리에 엔지니어의 선택지엔 밀양과 가덕도 둘 다 없었다. 슈발리에 엔지니어는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제시하면서 최종보고를 마쳤다. ADPi가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제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가덕도는 자연적 공항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 건설비가 많이 들고 건설 자체도 어렵다. 밀양은 전통적 의미에서 신공항 입지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지만 접근 가능성 문제가 있다. 김해국제공항을 확장하는 경우 현재 제기되는 안전 이슈를 해소할 수 있고 기존 시설을 누릴 수 있다는 접근성에 장점이 있다. 기존 시설을 제거하는 필요도 줄어들 수 있다.”
다시 동남권 신공항 프로젝트가 백지화된 순간이었다. 슈발리에 엔지니어는 가덕도에 활주로 2개짜리 신공항을 지을 경우 10조 원 이상 재정 투입이 예상될 것으로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는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김해 신공항’이라고 명명하며 신공항 프로젝트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남 지역 민심은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신공항 프로젝트 연장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16차례 이상 용역조사에서 불가 판정을 받은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다시 한번 공론화한 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발 여론도 거세졌다.
박근혜 정부의 신공항 프로젝트 백지화 이후 신공항 추진 세력 지형도가 크게 바뀌게 됐다. 2016년 박근혜 정부가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립을 추진한 까닭이었다. 이로써 동남권 신공항 추진 당시 신공항 입지로 밀양을 지지했던 두 축, 대구·경북이 갖고 있던 신공항에 대한 열망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들이 PK 지역 광역단체장(경남도지사·부산시장·울산시장)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이 지역 지자체들은 가덕도 신공항 건립 재추진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재임 당시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에 반대하며 가덕도 신공항을 추진하자는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18대 대선부터 동남권 신공항 입지로는 가덕도가 더 적합하다는 뜻을 내비친 바 있다.
김해신공항 확장이 사실상 백지화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사진=연합뉴스
가덕도 신공항에 대한 PK 지역 염원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토교통부는 2019년 초까지만 해도 가덕도 신공항 건설 의사가 없다는 의사를 피력해왔다. 그러던 2019년 6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오거돈 당시 부산시장, 송철호 울산시장, 김경수 경남도지사와 동남권 신공항 추진 관련 사안을 국무총리실로 이관하는 것에 합의했다.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검증위)’는 1년이 넘는 검증 기간을 거친 뒤 타당성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11월 17일의 일이다.
이날 검증위는 “김해신공항(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은 상당 부분 보완이 필요하고 미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면서 “김해신공항 추진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검증위 발표는 사실상 김해국제공항 확장안 백지화를 의미했다. 더불어민주당과 부산시가 가덕도 신공항 건립 필요성에 한목소리를 낸 만큼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은 폐기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선 검증위 발표에 대해 ‘내년 부산시장 보궐선거 PK 민심을 여당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포석’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더불어민주당이 당헌까지 바꿔가며 부산시장 선거에 후보를 내는 만큼, 부산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행보를 보인다는 내용이다. 오거돈 전 시장이 강력하게 추진하던 가덕도 신공항 바통을 이어받을 차기 부산시장 후보군에게 힘을 싣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검증위가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사실상 백지화하자,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준비에 들어갔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11월 19일 소셜미디어에 가덕도 신공항 이름을 ‘가덕도 노무현 국제공항’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진=이종현 기자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4년 동안 김해신공항 확장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다가 권한 없는 국무총리실 산하 검증위원회를 꾸려 결론을 뒤집으려 한다”며 정부·여당을 비판했다. 주 원내대표는 “검증위 보고서 자체도 모순투성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은 주 의원 발언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더불어민주당보다 한발 앞서 ‘부산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을 발의했다. 특별법 발의엔 하태경, 장제원 의원 등 부산 지역구 의원 14명이 박수영 의원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박 의원은 “특별법엔 김해공항을 이전하고, 새로 건설하는 공항 위치를 가덕도로 명시하는 내용이 담겼다”면서 “동남권 신공항에 대한 정치·소모적 논쟁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라고 했다. 하태경 의원은 “더 이상 부산·울산·경남 시민들을 희망고문하면 안 된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가덕도 신공항 추진을 공식화하고 신속하게 추진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부산, 울산, 경남 지역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11월 18일 국회 소통관에서 ‘가덕 신공항 건설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박은숙 기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민주당 전략은 TK를 고립시키고 PK를 내 편으로 만들어 보궐선거를 이기려는 것”이라면서 “2022년 대선판까지 흔들어보겠다는 의도”라고 정부여당을 비판했다. 안 대표는 TK와 PK간 감정의 골이 충분히 깊어지면 (김해국제공항 확장안 백지화 결정을) 동래파전 뒤집듯이 뒤집을 것“이라고 했다.
검증위 발표를 두고 검증위 내부 관계자들의 폭로도 이어지는 형국이다. 검증위가 김해신공항 유지 의견을 의결한 지 50일이 지나 이 결정을 뒤집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증위는 9월 25일 전체회의에서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을 사실상 확정하는 최종보고서를 의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9월 25일 회의엔 김해국제공항 확장안에 반대 의사를 보인 안전분과 위원 4명이 불참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21명 중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의된 내용은 ‘김해국제공항 확장안 조건부 유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검증위 관계자들은 11월 17일 검증위 최종 보고 내용에 대해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몇몇 검증위원들은 ‘김해신공항 유지’로 알고 있던 최종 보고 내용이 ‘김해신공항 백지화’로 백팔십도 돌아선 것에 대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가덕도.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신공항을 향한 PK 지역 염원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동남권 신공항 프로젝트는 정국의 화약고로 떠올랐다. 그러나 영남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정치인들 반응은 시큰둥한 모습이다.
한 충청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가덕도 신공항은 우리 지역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면서 “큰 규모 예산을 들여 신공항을 들인다 해도 혜택을 보는 건 일부 영남 지역 시민들”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동남권 신공항 프로젝트는 특정 지역만 혜택을 보는 이슈”라면서 “대규모 예산이 특정 지역 이권 사업에 투입되는 게 달갑지만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강원 지역 정치권 관계자도 “김해국제공항은 지금도 흑자인 상태”라면서 “흑자인 공항을 굳이 새 공항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우리나라엔 공항이 너무 많다”면서 “차라리 이미 지어진 공항을 내실 있게 운영하는 방향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본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