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한 LG, 조 단위 배상금 받아낼까…SK 항소로 장기화하나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과의 ‘배터리 분쟁’에서 이겼다.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사진=연합뉴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10일(현지시간)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손을 들어줬다.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신청한 영업비밀 침해 사건에서 LG에너지솔루션 주장을 인정해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내 일부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과 수입을 10년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ITC는 SK이노베이션이 공급하는 업체인 포드, 폭스바겐의 미국 내 생산을 위한 배터리와 부품 수입은 허용하는 유예 조치를 내놨다. 포드에는 4년간, 폭스바겐에는 2년간의 수입을 허용했다. 이미 판매 중인 기아 전기차용 배터리 수리 및 교체를 위한 제품 수입도 허용했다. SK이노베이션은 폭스바겐과 포드에, LG에너지솔루션은 테슬라와 제너럴 모터스에 각각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양사는 이날 상반된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영업비밀 침해 최종 결정을 인정하고 소송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길 기대한다”며 “지난해 2월 조기패소 결정에 이어 이번 최종 결정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송을 계속 소모전으로 끌고 가는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경쟁사에게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SK이노베이션은 “ITC 결정은 소송 쟁점인 영업비밀 침해 사실을 실질적으로 밝히지 못한 것이어서 아쉽다”고 유감을 표명하며 “이번 결정을 바로잡고자 최선을 다하고, ITC의 판결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향후 항소 등 정해진 절차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진실을 가리겠다”고 했다.
#2년간의 소송전 패소 SK 큰 타격…이후 변수는
LG에너지솔루션은 전기차용 배터리로 활용되는 2차전지 기술과 관련, SK이노베이션이 자사 인력을 빼가고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2019년 4월 ITC에 조사를 신청했다. ITC는 소송 전후로 있었던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기술을 빼낸 증거 훼손 행위 등을 근거로 지난해 2월 예비 판결에서 SK이노베이션에 대해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기술을 빼낸 증거를 인멸했다는 이유 등으로 ‘조기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번 최종 결정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조기패소 판결 이후 SK이노베이션의 요청과 영업비밀 침해 소송의 복잡성 등을 고려해 ITC 위원회가 ‘전면 재검토’를 했으나, 조기패소 판결이 그대로 이어진 것. ITC는 불공정 무역 행위에 대한 조사와 규제를 수행하는 대통령 직속 연방 준사법기관이자 행정기관으로 미국 내 수입, 특허 침해 사안을 판정하고 수입·판매 금지 및 중지명령 등을 내릴 수 있다. 특허 등 침해와 관련해서는 ITC나 연방법원에 소송을 낼 수 있고 양자를 병행할 수도 있다. LG는 ITC 소송과 함께 델라웨어주 연방지법에 소송도 제기했다.
ITC 절차는 한국의 행정심판과 유사하며 최종 결정 이후 60일 동안 대통령의 승인 절차를 거친다. 일각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전기차 생산 및 일자리 창출 등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언급되지만, 지적재산권 다툼에 대한 행정부의 개입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 SK이노베이션은 입장문에서 “미국 내 배터리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앞으로 미국 대통령 심의 등 남은 절차를 통해 안전성 높은 SK 배터리와 미국 조지아 공장이 미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 중인 친환경 자동차 산업에 필수적이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 수천 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집중적으로 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ITC 설립 100여 년의 역사상 범죄 행위에 해당할 수 있는 영업비밀 침해 건에 거부권이 행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부권에 해당하는 사안도 수입금지에 관한 것으로 영업비밀 침해 사실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2010년 이후 ITC 최종 결정에서 수입금지 명령이 나온 영업비밀 침해 소송은 총 6건이며, 이 중 5건이 항소를 진행했으나 결과가 바뀐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에 포드 4년, 폭스바겐 2년 수입 허용이라는 예외 조항을 둔 ICT 결정은 포드와 폭스바겐의 차 생산에 생산이 없도록 하기 위한 차원이다. 이로 인해 SK이노베이션의 피해 규모가 더 커졌다는 분석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포드와 폭스바겐 차 생산 부품을 공급하기 위해 수 조원을 들여 공장 지은 뒤 4년 뒤엔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며 “유예 기간 포드와 폭스바겐이 다른 배터리 공급처를 찾도록 미국 내 피해를 최소화한 조치로, SK이노베이션에만 타격이 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과의 ‘배터리 분쟁’에서 승소하면서 양사의 이후 행보에 업계 관심이 쏠린다. 서울 종로구의 SK본사. 사진=연합뉴스
#유리한 고지 점한 LG, 수조 원대 합의금 받아낼까
ITC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LG에너지솔루션은 합의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ITC 소송은 민사소송이어서 최종 결정 이후에도 양사가 합의하면 즉시 소송 결과와 관계없이 공장 가동과 영업 등이 가능한 만큼,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해 SK이노베이션 측이 LG에너지솔루션이 원하는 합의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입장문에서 SK이노베이션 측에 “침해된 영업비밀에 상응하고 주주와 투자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안을 제시해 소송을 마무리할 것”을 촉구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ITC 최종 승소 결과를 토대로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품목에 대한 미국 내 사용 금지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국내외에서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SK이노베이션은 60일 이내에 미국 연방항소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 그러나 항소 기간에 수입금지 및 영업비밀 침해 중지 효력은 지속되고, 이어지는 다른 소송도 ITC 결정에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SK이노베이션은 이전보다 협상에 더 적극적일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중국, 일본 등 글로벌 배터리 업체들과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고, 기업공개(IPO)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소송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 있다. 특히 소송이 장기화하면 양사 모두 막대한 소송비용과 법적 리스크, 사업 불확실성 등에 시달려야 한다.
양사는 국내외에서 소송을 벌이면서도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내놨지만, 양측이 서로 제시한 배상금 격차가 워낙 크고 영업 비밀 침해 여부에 대해서도 입장이 갈려 협상이 진전되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에 영업비밀 침해로 약 3조 원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반면, SK이노베이션이 제시한 금액은 수천억 원대로 알려져 있다.
국내 정치권과 업계의 양사 소송에 대한 우려가 커진다는 점에서 소송전이 더 길어지는 것은 양사 모두에게 이득이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최근 정세균 국무총리는 양사에 합의를 촉구한 바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을 포함한 배터리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하고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배터리 기술을 내재화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도 소송전에 힘쓰기보단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배터리 시장을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어 “LG에너지솔루션은 IPO를 앞두고 있고 현대차와 합작사도 만들어야 하는데 재판이 길어지면 부담이 크다. SK이노베이션도 항소를 하더라도 미국 내 수입금지 조치라는 결과는 유효하고 항소에서도 져버리면 소송비용에 더해 재판 결과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하기 때문에 합의할 가능성이 많다”고 관측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