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경제 전문가 등 만나며 보수 우군 확보…‘일찍 붙어봐야 손해’ 경쟁 주자들과 거리두기
윤석열 전 총장의 ‘고구마 행보’에 대해 정가에선 그가 살아왔던 인생과 연관 지어 바라본다. 9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윤 전 총장 이력이 말해주듯 앞뒤좌우를 두루 살피며 뚜벅뚜벅 가는 것이 특기라는 것이다. 속공보다는 지연공세 전술로 당내 대권 주자들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정면충돌 방식이 아닌 상대 고사 전략을 펴겠다는 계획적 발걸음으로 분석된다.
#윤석열 “정치도 내 인생처럼”
윤석열 전 총장이 서울대 법대 동기들보다 한참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 79학번으로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지만, 2차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져 9수 끝인 1991년에야 사시 관문을 통과했다. 지인들은 고시 합격이 늦었던 이유를 두고 윤 전 총장의 독특한 성격과 연결 짓는다. 재학 중 합격, 이른바 소년 급제를 위해 앞뒤 살피지 않고 책만 파는 유형이 아니라 윤 전 총장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과 토론을 즐겼으며 고시생 동료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면 외면하지 않고 자세히 알려주다가 정작 본인은 자꾸만 낙방의 쓴맛을 봤다는 게 주변 사람들 목격담이다. 고시생들은 공부에 바빠 경조사를 챙기기가 어려운데 윤 전 총장은 친구 상가에 가 빈소를 지키는가 하면 장지까지 따라간 뒤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상여를 멘 적도 많았다고 지인들은 기억한다.
아홉 번째 사시를 봤을 때 일화는 유명하다. 법대 동기가 윤 전 총장에게 함진아비를 부탁하자, 윤 전 총장은 함이 들어가는 당일 대구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2차 시험 불과 며칠 전 일이었기에 모두가 윤 전 총장의 행동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9수 끝에 검사가 됐지만 검사 인생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윤 전 총장은 이명박 정부까지만 해도 ‘특수통’으로 이름을 떨치며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10월, 그의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이던 윤 전 총장은 직속상관인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재가 없이 국정원 직원들의 체포영장을 청구해 발부받았다. 더 나아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소장 변경 신청서를 법원에 접수했다가 수사팀에서 전격 배제됐다. 그 여파로 윤 전 총장은 정직 1개월 중징계를 받고 대구고검 등 한직인 고검 검사로 오랫동안 떠돌았다. 대구지검의 한 수사관이 기억하는 윤 전 총장의 모습이다.
“대구고검에 좌천돼 왔을 때였다. 그 당시 희대의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 사건이 화제였는데 그 수사팀을 불러다가 윤 전 총장이 ‘수고한다’며 식사를 대접하고 밥값을 모두 계산했다. 엉뚱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윤 전 총장은 진지한 모습이었다. ‘억울한 피해자가 많은 사건이니 열심히 수사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보통 잘나가는 검사들은 혹여 좌천돼 있으면 바깥 활동을 아예 하지 않는데 윤 전 총장은 달랐다.”
한직을 전전하던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별검사팀에 수사팀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는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검사장으로 승진한 뒤 곧바로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됐으며, 검찰총장 자리까지 꿰찼다. 윤 전 총장을 잘 아는 법조인 출신 국민의힘 전직 의원의 전망이다.
“윤 전 총장은 대선에 출마할 것이다. 그런데 대선에 나서는 방식은 과거 다른 주자들과는 다를 것이다. 9수 끝에 사시 합격, 산전수전 끝에 검찰총장,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권력과 직접 겨뤘던 경험 등은 적어도 3선 중진 의원 이상의 경력이다. 당장은 손해 보더라도 천천히, 좌우를 잘 살피면서 자신의 길대로 갔을 때 결국 결과가 좋았다는 ‘사필귀정식 정치’를 할 것이다.”
#우군부터 넓고 두텁게
검찰총장 사퇴 직전과 이후, 윤석열 전 총장의 행보를 보면 하나의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정치세력이 전혀 없는 그가 보수 세력이라는 우군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총장직을 던지기 직전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를 찾았다. 과거 근무했던 곳이기는 하지만 지검장을 했던 곳은 아니고, 더욱이 고향이 아님에도 그가 대구를 찾아갔던 것은 보수 지지 세력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기 위한 계산이었다.
윤 전 총장은 6월 9일 서울 남산예장공원에 문을 연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개관식을 찾으면서 검찰총장 사퇴 이후 첫 공개행보를 했다. 이에 앞선 6월 5일에는 서울 현충원을 참배했다. 6월 6일에는 K9 자주포 폭발사고 피해자와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 전우회장을 잇달아 만나기도 했다. 보훈 및 안보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경제 관련 전문가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는 것도 보수정당 정치인은 경제에서 유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윤 전 총장은 6월 1일 서울 연희동의 골목 상권을 방문,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만났다. 모 교수는 전국의 골목을 직접 찾아다니며 한국의 골목지도를 완성한 ‘골목길 경제학자’로 유명하다. 이어 국민의힘 내 경제전문가인 윤희숙 의원을 만난 사실 역시 공개되기도 했다.
대구 외 지역별 보수 세력 접점 넓히기도 계속되고 있다. 윤 전 총장은 5월 29일 강원도 강릉을 찾아 동갑내기 죽마고우인 권성동 의원을 만났다. 권 의원 지역구인 강릉은 윤 전 총장의 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소 약해졌지만 강원도는 보수 세력이 강한 곳이다. 국민의힘 내부 충청권 맹주로 불리는 정진석 의원과는 5월 25일 서울시내에서 만났다. 정 의원은 윤 전 총장의 부친 고향이 충청도라는 점을 들어 국민의힘에서 ‘충청 대망론’ 불을 지핀 바 있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지금 윤 전 총장의 스탠스는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계획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직능별 지역별로 집토끼를 철저하게 잡아서 집안에서 적장자로 먼저 인정받으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 전략이 먹히고 있다. 여러 의원들이 윤 전 총장과의 끈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입당만 안했을 뿐 벌써 국민의힘의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가 됐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잠룡들과는 사회적 거리두기
윤 전 총장은 국민의힘 안팎 대선 잠룡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정면대결을 최대한 미루려는 모양새다. 지지율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압도적으로 앞서나가는데, 일찍 붙어봐야 손해만 본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에 국민의힘 안팎 대선 잠룡들은 윤 전 총장을 조기에 링에 끌어올리기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원희룡 지사와 유승민 전 의원 모두 최근까지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에게 포격을 집중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총구를 윤 전 총장 쪽으로 돌리고 있다. 본선보다는 윤 전 총장이 나올 가능성이 큰 예선 통과가 더 급해진 때문이다.
유승민 전 의원은 6월 7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윤 전 총장을 겨냥해 “너무 숨어서 간 보기를 한다. 간 보기 그만하고 이젠 뛰어들어야 한다”고 직격했다. 원희룡 제주지사 역시 강한 톤으로 윤 전 총장을 압박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 불출마 선언으로 배수진을 친 원 지사는 6월 8일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윤 전 총장이 빨리 수면 밖으로 나와 정치력과 비전에 대해 검증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당대회 이후 국민의힘 복당이 유력한 홍준표 의원은 윤 전 총장에게 가장 버거운 상대로 꼽힌다. 거친 입담을 가진 홍 의원이 ‘윤석열 저격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 홍 의원은 지난달 신속한 복당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윤 전 총장을 “우리 당 출신 두 대통령을 정치 수사로 구속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또한 홍 의원은 윤 전 총장만 보이는 각종 여론조사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는 6월 8일 한국갤럽의 지지율 여론조사가 불공정하다며,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당내 예선에서 윤 전 총장에게만 공격을 집중하는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 전 총장은 초반부터 난타를 당하는 모양새를 피해야 한다. 입당이나 대선 열차에 오르는 행보를 늦추는 이유다. 윤 전 총장은 어차피 대세론에 몸을 실었는데 지지율이 턱없이 낮은 국민의힘 후보들과 미리 싸워서 반창고를 붙일 이유가 없다. 고구마 언변을 보이면서 거북이처럼 가다가 결승점을 앞두고는 치타처럼 잽싸게 들어갈 것이다.” 윤 전 총장 외 대안 불가론을 주장하는 국민의힘 한 의원의 전망이다.
한편 윤 전 총장은 6월 10일 이동훈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공보담당자로 선임했다. “도대체 뭘 하느냐. 간 보기만 하느냐”라는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보이지만,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고구마 행보가 계속 될 것으로 본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