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남녀 프로기사 중 승률 1위 “어릴 적 싸우는 바둑 터득…요즘은 ‘강약조절’ 합니다”
여자바둑리그 서귀포 칠십리의 맏언니 이민진 8단이 팀 동료 조승아 3단을 두고 한 말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주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는 막내를 위한 립 서비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최근 조승아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니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최근 왕십리 기가(棋街)에선 조승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7월 3일 현재 17연승 폭풍 질주 중이다. 올해 성적은 28승 5패(여자기사 상대로 23승 1패, 남자기사에게 5승 4패)로 전체 프로기사 386명 중 승률도 1위로 올라섰다.
“저, 인터뷰는 처음인데요….” 쑥스러운 표정이지만 시작 전 사진 촬영을 먼저 부탁하자 생글생글 웃는다. 바둑판 앞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돌지만 촬영에 응하는 얼굴은 영락없는 20대 초반의 싱그러움이 묻어난다.
―바둑은 언제 시작했는지.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외삼촌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보고 시작했어요. 바둑 두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나 봐요. 부모님을 졸랐고, 집 근처 신공항 바둑교실을 찾아 조규철 원장님께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기재가 조금 있었던지 3학년 때 원장님이 도장으로 옮겨 본격적인 바둑의 길을 걸어볼 것을 권유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프로 입단은 열여덟, 2016년에 했다. 늦은 편이었다. 당시 여자 연구생 중에 대어가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소식이 없더니 한참 후에야 입단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입단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고민이 많았어요. 이번엔 되겠지, 이번엔 되겠지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고민도 많았고,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뒤처지면 어떡하나. 고민이 많았던 기억이 나네요.”
―올해 갑자기 성적이 좋아졌다. 비결이라도 있는지.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갑자기 성적이 좋아져서 저도 좀 어리둥절한 느낌입니다. 제 생각에도 좋아진 것 같긴 한데 특별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아, 올해 초 일기장에 ‘져도 더 이상 아파하지 않겠다’라고 썼거든요. 그전까지는 지면 속도 많이 상하고, 화가 주체가 안 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요즘은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웃음).”
조승아 3단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여자기사들을 상대로 23승 1패를 기록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조승아는 최근 열린 ‘역대영재 vs 여자정상 연승대항전’에서 이연 3단과 현유빈 4단을 잇달아 꺾었는데 현유빈은 작년 하찬석국수배 영재최강전 우승자이고, 이연은 올해 대회 준우승자다. 10대라고 해도 우승을 경험해본 신예들은 여자 정상에게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는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 전에는 국가대표 연구실로 출근했는데 작년부터는 주로 집에서 인터넷 대국을 하거나 인공지능을 이용해 공부도 합니다. 그래도 월 7회 정도 한국기원에 나가서 국가대표 리그전을 하는데 이 실전대국이 무척 도움이 됩니다.”
―기풍이 굉장히 공격적이고 전투적인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려서 바둑 배울 때 선생님들이 싸우라고, 자꾸 싸워야 바둑이 는다고 하셔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웃음).”
―어느 선생님이?
“김기헌 사범님이.”
―얘기대로 과거 너무 전투로 일관하다가 좋은 바둑을 그르친 경우도 많았다던데.
“그래도 최근엔 좀 나아져서 나름 강약조절을 합니다. 과거엔 정말 싸우는 것밖에는 몰랐는데 요즘은 잘 안되면 돌아가는 요령도 생긴 것 같아요. 갓 입단하고 나서는 박영훈 사범님의 바둑을 좋아하고 닮고 싶었습니다. 바둑을 어쩜 그렇게 깔끔하게 두시고 형세 판단이 정확한지, 제게는 없는 그것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입단 전에는 김대용 사범님에게 지도 많이 받았고, 국가대표 연구실에서는 박정상 사범님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릴 적 ‘싸우는’ 방법으로 바둑을 익힌 건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옳았다고 생각해요.”
―인공지능(AI)이 바둑 연구에 도움에 되나.
“장단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초반 포석단계 연구가 많이 이뤄져서 초반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되는 건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국 후 복기할 때도 인공지능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최근 기사들 사이에서는 AI의 국제적 보급으로 인해 포석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전투력을 바탕으로 한 힘 바둑과 중후반이 강한 기사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향후 목표가 있다면.
“곧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가 열리는데 여기서 좋은 성적, 아니 우승하고 싶습니다.”
―우승하려면 최정 9단이나 중국 위즈잉 6단 등 이름난 강자들을 넘어야 하는데.
“이젠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듭니다(웃음). 입단 후 처음 최정 언니나 위즈잉을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데 당시엔 마음속으로 설레면서 바둑을 뒀어요. 그래선 이길 수가 없지요. 하지만 이젠 누구와 둬도 승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바둑계 한 관계자는 “여자바둑에서는 그동안 최정, 오유진, 김채영을 빅3로 꼽아왔지만 이젠 조승아까지 포함해 빅4로 불러야 할 것 같다. 최정을 넘기 위해 그동안 오유진과 김채영이 수차례 도전을 해왔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반면 조승아는 상대적으로 최정을 상대해 본 경험이 적어 최정에게 주눅 들지 않았다는 게 강점이다. 기풍도 오유진이나 김채영이 치고 빠지는 아웃복서 스타일이라면 조승아는 일격필살의 펀치력을 갖춘 인파이터라 비슷한 유형의 최정을 상대할 때 유리할 수 있다”면서 “현재 여자기사 중 최정을 넘어서는 기사가 나온다면 조승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조승아의 질주가 어디까지 계속될지 주목된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