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무작위 배정 교감시간 단 20분 낙마사고 반복…국제연맹 “승마 규칙 전면 재검토”
도쿄올림픽 이후 근대5종 승마 경기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승마에 있어서 성적이 실력이 아닌 뽑기 운에 맡겨지는 경우가 상당한 데다 말의 입장에선 짧은 시간에 난생 처음 보는 기수들과 강제로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동물 학대라는 비판 여론이 거세진 까닭이다. 결국 국제근대5종연맹(UIPM)은 말을 무작위로 배정하는 현 규정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동물도 선수도 위험
하루에 5개 종목을 실시해 진정한 철인 경기라고 불리는 근대5종은 전쟁에서 유래했다. 근접한 적을 칼로 제압하고(펜싱), 강을 헤엄쳐(수영), 적의 말을 빼앗아 타고(승마), 먼 거리의 적은 총으로 제압하며(사격) 달려서 적진을 돌파하는(육상)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이 나폴레옹 부하의 거침없는 적진 돌파 모습에서 영웅심을 기리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근대5종은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부터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열리고 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는 전태웅(26)이 동메달을 획득해 대한민국 근대5종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따냈다.
한편 여자 개인전에서는 세계적으로 안타까움을 산 사고가 발생했다. 수영과 펜싱 중간합계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던 독일의 아니카 슐로이가 승마에서 0점을 받으며 메달 순위권에서 떨어진 것이다. 2016년 리우에서 최종 4위에 올랐던 슐로이는 도쿄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되는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문제는 슐로이에게 배정된 말 ‘세인트보이’였다. 이미 연습시간에서부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세인트보이는 경기가 시작된 이후로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슐로이가 채찍과 고삐로 말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자 독일 근대5종팀 감독인 킴 라이스너가 달려와 “heat(때려라)”라고 소리치며 말을 채찍질하라고 다그쳤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직접 말의 엉덩이 쪽을 주먹으로 여러 차례 때리기도 했다.
슐로이의 애원 끝에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두 사람의 호흡은 오래가지 못했다. 3번째 장애물에서 다리가 걸린 세인트보이는 끝내 4번째 장애물을 넘지 않았다. 결국 슐로이는 승마에서 0점을 받아 최종 31위로 대회를 마쳤다. 그보다 앞서 세인트보이를 배정받은 러시아의 선수 굴나즈 구바이둘리나 역시 말을 통제하지 못해 마찬가지로 0점 처리됐다.
이 사건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경기 직후 공개된 슐로이와 그를 태운 말의 사진이었다. 안장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기수와 반대로 그를 태운 말의 표정이 앞니를 드러내고 마치 미소를 짓는 듯 보인 까닭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말이 웃고 있다”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말을 지급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실제로 세인트보이는 웃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전문가에 따르면 말이 윗입술을 말아 앞니를 드러내는 행동은 주변에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날 때 이를 감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눈이 확장된 채로 귀가 앞으로 향해 있다면, 이는 위협을 느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인트보이는 당시 상황을 매우 위협적이라고 느껴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독일의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도 “말이 기뻐서라기보다는 힘들어할 때 나오는 공격적 표정”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해프닝이 발생한 이유는 근대5종의 경기 규칙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승마 경기는 선수의 말이 아니라 주최 측이 미리 준비한 말을 무작위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경기 전 말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은 약 20분 정도만 주어진다. 한 번 배정된 말은 4회 이상 명령을 거부하지 않으면 교체할 수 없다. 다루기 힘든 말을 만날 경우 0점을 받을 수도 있다. 선수 실력과는 별개로 제비뽑기 운에 성적이 좌우되는 것이다.
근대5종의 경기 방식은 동물 학대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승마는 사람과 말이 서로의 움직임을 교감하며 느끼는 운동이다. 그런데 말의 입장에서 충분한 교감 시간 없이 불특정 다수의 기수와 여러 번의 경기를 치러야 하는 방식은 가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말은 매우 섬세해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이다.
경기 직후 독일 선수 권리 보호단체인 아틀레텐 도이칠란트는 “동물을 보호하고 선수들이 적절한 방식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근대5종의 규칙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아니카 슐로이의 코치 킴 라이스너는 펜스 너머에서 말을 주먹으로 치는 등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나 남은 기간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대회마다 반복되는 낙마사고…“규칙 전면 재검토할 것”
근대5종 승마 경기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올림픽 당시에는 승마 경기 전 선수들에게 나눠주는 승마 지침이 매우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해당 지침에는 선수들이 타야 할 말의 기질이 적혀 있는데 ‘노련함, 판단력 있음’ ‘예민함’ ‘다루기 쉬움’ ‘세심함’ 등 승마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모호한 묘사들로 설명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낙마사고는 매 대회마다 빠지지 않고 발생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는 과테말라 선수가 우리나라 전웅태 선수와 같은 말을 타다가 추락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의 황우진 선수도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헝가리의 국가대표 빅토르 호르바트가 장애물을 넘다가 낙마했다.
경기 과정에서 선수와 말 모두 부상을 입는 일도 흔하다. 미국의 근대5종 전 국가대표이자 올림픽 3관왕인 마고 이삭센은 2012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무것도 넘지 않으려는 말을 배정받았고 지난해(201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대회에서 팔이 두 군데 부러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방문한 몇몇 국가의 말들은 거의 절름발이에 가까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빠른 시간 내에 말과 교감하기 위해 말에게 선물을 주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삭센은 NBC와의 인터뷰에서 “종종 말에게 뇌물을 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작은 사과나 쿠키를 가져와서 주고 그들을 사람처럼 대하면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고 하기도 했다.
한편 독일 올림픽위원회의 알폰스 회어만 위원장은 UIPM의 라이스너에 대한 징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경기 방식 변경을 검토해 달라고 요구했다. 회어만 위원장은 “기수와 말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규칙을 바꿔야 한다”며 “동물의 안전과 선수 사이의 공정한 경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UIPM은 이번 일을 계기로 올림픽 여자 근대5종 승마 종목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시행할 예정이다. UIPM 측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국제 경기 전반에 걸쳐 말 복지와 선수 안전의 중요성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