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 허가 취소 부당” 제주도 상대 항소심서 승소…부적합 사업 승인 복지부도 뭇매, 의료법 위반 논쟁 남아
#3개월 내 개원 못했지만…
이번 항소심에서 광주고법 제주 행정1부는 8월 18일 중국 녹지그룹의 자회사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가 제주도를 상대로 낸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 취소처분 취소소송’에서 병원 측이 기한 내 개원을 하지 못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인정하며 제주도의 취소처분에 대한 취소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녹지제주가 예상치 못한 조건부 허가와 허가 지연으로 인해 개원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며 3개월 이내에 병원을 개원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한다”며 “허가 지연 과정에서 채용 인력 과반이 이탈하고, 조건부 허가가 이뤄져 사업 계획 변경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에도 제주도는 계획을 다시 수립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기한 내 개원 못 할 사유가 있었음에도 허가를 취소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의료법에 따르면 병원은 개설 허가를 받은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문을 열어야 한다. 개설 허가를 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정당한 사유 없이 업무를 시작하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도가 2018년 12월 5일에 녹지병원에 내국인을 제외한 외국인 의료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조건부 허가를 내자, 녹지병원은 여러 이유를 들며 허가 3개월 내에 개원하지 않았다.
녹지병원이 조건부 개설 허가 이후 3개월이 지나도록 개원하지 않자 제주도는 2019년 4월 녹지병원 개설 허가를 취소했고, 녹지병원 측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다.
#‘외국인 전용’ 조건부 개원 허용
이런 잡음은 애초 서귀포 제주헬스케어타운 조성사업에서 외국계 의료기관 설립이 추진되면서 출발했다. 제주헬스케어타운은 JDC(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가 2008년부터 서귀포시에 약 15만 5000여㎡ 부지에 추진하고 있는 의료관광단지다.
2012년 7월 중국 기업인 녹지그룹이 제주헬스케어타운에 투자유치를 결정했고 제주도와 관련 협약을 맺었다. 이후 2015년 3월 제주도 영리병원 건립 사업계획서를 제출했지만 보건복지부가 이를 반려했다. 이에 녹지그룹은 개설허가 사전심사 재청구를 했고 그해 12월 복지부가 이를 승인했다.
사업이 승인되자 2017년 7월 서귀포시 토평동 제주헬스케어타운 내에 지하 1층, 지상 3층, 전체면적 1만 7679㎡ 규모의 녹지국제병원 건물이 준공됐고 사용승인이 완료됐다. 이어 8월 녹지그룹은 제주도에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제주도민과 시민단체 반발이 거세지자 제주도는 공론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를 공론화한다. 2018년 10월 조사위원회는 녹지국제병원의 개설을 불허하라는 권고를 내렸지만, 당시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그해 12월 녹지국제병원에 ‘외국인 전용’, ‘내국인 진료 제한’이라는 조건부 개원을 허용하면서 개원 시한을 3개월 뒤인 2019년 3월 4일로 한정했다.
하지만 녹지병원이 시한 내에 개원하지 않자 제주도는 4월 17일 녹지병원의 개설허가를 취소했다. 녹지병원 측은 ‘내국인 진료 제한’ 조처를 기형적인 병원 개설 허가 조건으로 보고 개원 대신 재판부에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조건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 대한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와 함께 녹지병원 개설 허가 취소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별도로 제기했다. 이에 2020년 10월 제주지법 1심 재판부는 제주도의 개설 허가 취소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했지만, 2021년 8월 18일 광주고법 항소심에서는 개설 허가 취소 처분을 취소한다며 이를 뒤집은 것이다.
녹지병원 측은 1심 판결 이후 “내국인 진료 제한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기형적인 병원 개설 허가를 내주고, 투자한 기업에 모든 책임을 미루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항소를 제기했는데 2심 재판부가 녹지병원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판결로 영리병원 개설 논란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녹지그룹의 영리병원 개설과 관련해 그동안 의료 공공성과 기업 활동의 자유라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하며 큰 논란이 돼 왔다. 때문에 국내 최초 영리병원으로 추진되고 있는 녹지병원 개설 여부가 인천과 부산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 설립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참여연대와 무상의료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는 “녹지국제병원 허가 취소를 뒤집은 광주고등법원의 판결은 부당하다”며 “박근혜 정부와 원희룡 전 지사가 추진하고 문재인 정부가 ‘영리병원 설립 금지’ 공약을 어기면서 방조한 영리병원 설립에 광주고등법원이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애초에 제주도가 3개월에 걸친 공론조사위원회의 불허 권고를 따르지 않고 조건부 허가를 함으로써 녹지병원에 조건부 허가의 허점을 내준 꼴”이라고 비판했다.
녹지병원 측이 복지부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에는 “녹지국제병원은 제주도를 방문하는 중국인 등 외국인 의료관광객이 대상이므로 공공의료에 미치는 영향이 없음”으로 돼 있지만, 녹지병원은 다시 말을 바꿔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허가한 것은 문제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참여연대는 또 “원희룡 전 지사는 제주도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데다 현행법에도 근거가 없는 내국인 진료 금지를 조건으로 영리병원 설립을 허가했다. 부적합한 사업계획서를 승인한 복지부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꼴”이라고 비난했다.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2020년 12월 15일 코로나 정국을 맞아 “제주헬스케어타운을 대한민국 공공보건의료를 선도하는 의료복합단지로 키워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영리법인 의료기관 설립 의료법 위반 논란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은 “돈이 되지 않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영리병원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대응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의료공공성과 제주도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녹지그룹의 손을 들어준 재판부를 규탄한다”며 “녹지국제병원 설립 과정은 의혹과 불법으로 점철됐고, 병원 사업 경험이 전무한 부동산 기업인 중국 녹지그룹은 국내에서 영리병원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해 국내 의료법인을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국내 의료법인의 우회진출 문제가 제기되며 이는 의료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현행 국내 의료법에 따르면 영리법인은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없고 의사나 정부, 지방자치단체, 학교법인, 사회복지재단, 의료법인 등만 비영리로 의료기관을 세울 수 있다. 또 제주특별자치도 보건의료 특례에 관한 조례에도 의료기관 개설 사업자는 의료 관련 유사 사업 경험이 있어야 하고, 국내 의료자본의 우회 투자 논란이 없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한 누리꾼은 “미국과 같이 영리병원이 일반화되면 병원 문턱은 서민이 접근하기 어려워지고 재벌보험회사만 배불려주는 꼴이 되는 것을 정부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걸까?”라며 우려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저명한 의사들은 고액 연봉으로 영리병원으로 먼저 갈 테니 앞으론 부자들은 고급 진료 받고 돈 없는 서민들은 저급 진료 받아야 되나. 병원 진료조차 차별받는 세상이 되려나”라며 걱정했다.
영리병원 반대 운동을 벌여온 ‘의료영리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제주도민운동본부’는 “코로나19로 공공의료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에서 이번 판결은 의료 공공성을 훼손하는 판결”이라며 반대 운동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개설허가 취소가 부당하다는 광주고법 제주 행정1부의 판결에 대해 제주도청은 27일 “현재 입장을 정리 중”이라고만 밝혔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