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서 단독 입수, 도박 아닌 타팀·선수 ‘생존 위해’ 밀어주기…경찰에선 다 부인해 무혐의 결론
일요신문은 승부조작 의혹이 담긴 진술서를 입수하고 의혹 시점 직후 감독이었던 A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취재를 종합해보면 익명을 요구한 A 감독이 승부조작을 파악한 것은 2018년이었다. 그는 “진술서 내용은 사실”이라며 “씨름판이 워낙 좁아 이름이 드러나면 활동을 못한다”고 말했다. A 감독에 따르면 2018년 씨름 감독들 사이에서 승부조작 관련 얘기가 파다하게 돌았다고 했다. ‘감독, 선수 할 것 없이 승부조작에 동참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A 감독이 결정적으로 해당 의혹을 파악한 것은 2018년 10월쯤이다. 그는 “감독은 샅바만 보면 선수가 최선을 다하는지 아닌지 딱 안다. 이길 수 있는 상대한테 힘을 안 쓰는 게 보이길래 불러다가 얘기했더니 ‘져주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A 감독은 연루된 선수들을 불러다 사실을 파악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승부조작이 너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A 감독은 승부조작을 뿌리 뽑기 위해 이런 내용을 진술서 형태로 남겨뒀다. A 감독이 파악한 승부조작은 다음과 같다. 승부조작은 팀 훈련 시 동료들이나 경기장에서 만난 타팀 선후배들 사이로 제의가 오갔다. 선수들은 최소한의 성적을 내야 재계약이 된다. 성적이 좋지 못한 선수는 계약만료가 다가올 시점에 선후배들에게 부탁해 소위 ‘밀어주기’(져주기)를 받아 성적을 냈다.
일반적으로 승부조작은 스포츠 도박 관련 브로커가 접선하면서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야구, E스포츠 종목 스타크래프트 등이 해당되는 경우다. 하지만 씨름 승부조작은 선수들의 진술에 따르면 스포츠 도박과는 관련이 적어 보였다.
B 선수는 진술서에 “(개인전에서) 팀 동료가 (특정 선수에게 져주라는) 얘기를 꺼냈다. 망설였으나 이미 얘기가 다 끝났다고 자꾸 져주라고 해서 컨디션도 좋지 않아 가담하게 됐다”며 “돈을 거래하진 않았고 차후 타팀으로 이적할 경우 다시 양보를 받기로 약속했다”고 적었다.
단체전에서도 승부조작 의혹은 계속됐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팀이 우승까지 차지하면서다. C 팀은 창단 후 성적이 좋지 않았고 해당 대회에서도 성적을 내지 않으면 해체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당시 감독이 승부조작 카드를 꺼내들었다고 했다.
당시 D 선수 진술서에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D 선수는 “준결승전에서는 감독이 사전에 찾아가 밀어달라고 했지만 준결승전 상대 팀 감독은 ‘져주는 것은 힘들고 7전 4선승제 승부경기에서 3점을 먼저 주고 나머지 한 점은 실제 승부로 하자’고 했고 약속대로 3점을 우리가 앞서서 경기를 했다. 4경기 이후 팀 동료가 기대하지 않은 승리를 거둬 팀이 승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D 선수는 “결승전에서도 감독이 선수를 불러 모아 ‘약속이 다 끝났다. 단체전은 4 대 3으로 우리가 이긴다’고 했고 상대팀이 1번, 2번, 3번, 4번이 지는 것으로 약속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우리 팀 1번이 실수를 해서 첫 판을 졌다. 그래서 다시 4번이 이기고 5번, 6번이 져서 3 대 3인 상황을 만들었고 마지막 7번이 이기기로 해서 극적인 우승을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이 승부조작을 할 때는 우리 팀 감독이 상대 감독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얼마 정도 돈을 줬다고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E 선수도 “당시 우리 팀은 결승전 상대와 경기 하면 100번 해도 1번도 못 이길 실력이었다. 승부조작이 맞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사실확인서를 썼다. 여러 선수들은 “당시 감독 지시가 있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진술서 등을 작성했다.
A 감독은 이 내용을 진술서, 녹취록 등으로 작성해 2019년 씨름협회 등에 지속적으로 얘기했지만 다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A 감독은 해당 의혹을 지난해 7월 관할 지방경찰청에 제보했다. 사건은 지방경찰청에서 수사를 하다 선수들이 입을 모아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무혐의로 결론났다고 전해진다. 이 지방경찰청 담당 수사관은 “수사했던 사건에 대해 말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그런데 A 감독은 해당 내용을 제보한 뒤 씨름판에서 수사기관의 실수로 제보자 신원이 자신으로 드러나면서 사실상 씨름판에서 축출된 상태라고 했다. A 감독은 “제보자 정보 유출로 당시 수사 관계자들을 고소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A 감독은 “승부조작 관련해서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고 설명했다.
B 선수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진술서나 사실확인서 등은 감독 지시로 작성했고 모두 사실이 아니”라면서 “이 일은 이미 다 끝난 일이다. 끝난 일을 왜 또 얘기하나”라고 말했다. 나머지 선수들도 전면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다만 이런 해명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선수들이 당시 상황을 구술한 녹취록과 지장까지 찍힌 사실확인서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요신문은 씨름협회 측에 관련 입장을 문의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스포츠 업계 관계자는 “씨름은 단순히 운동 종목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전통 문화이기도 하다. 씨름계 승부조작이 사실이라면 체육으로서의 씨름, 문화로서의 씨름 양쪽 모두에 먹칠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근 모래판에는 이른바 ‘씨름돌’(씨름+아이돌의 합성어)로 불리는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승부조작 관련 의혹이 사실일 경우 조금씩 살아나는 씨름 인기에 찬물을 부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