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쿠데타 5·18 유혈진압 ‘체육관선거’ 통해 집권…인권침해·언론탄압·부정부패 끝내 사과 없이 떠나
1931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출생한 전두환 씨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학했다. 육사가 4년제로 개편된 뒤 첫 기수였다. 입학한 뒤 4년 동안 그의 룸메이트는 노태우 씨였다. 전 씨가 졸업할 당시 육사 11기는 156명이었다. 156명 중 전 씨 성적은 121등이었다. 특출날 것 없는 성적이었으나, 동기들 사이에선 그의 리더십이 주목받았다. 운동 실력과 카리스마를 앞세워 동기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기 중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전 씨에게 높임말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육군 장교로 임관한 전 씨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왔다. 1961년 5월 육군 ROTC 창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된 그는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선정됐다. 비전투 업무에 배치된 상황에서 대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5·16 군사정변이었다. 전 씨는 군사정변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행동’에 나섰다. 전 씨 기획 아래 육사 생도들은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30세 대위였던 전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신임을 얻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으로 임명됐다.
박 전 대통령은 전 씨에게 전역 및 정치 입문을 권유했다. 그러나 전 씨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남기며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충성맹세를 했다. 정치군인 행보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전 씨는 동기생 일부와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했다. 군 내부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한 조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런 하나회를 암묵적으로 후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승승장구했고, 하나회 리더인 전 씨 또한 군 내부 요직을 맡으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69년 동기생 중 처음으로 대령에 진급한 전 씨는 1970년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직함을 달고 베트남전쟁에 파병됐다. 1973년 전 씨는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다. 1976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보안차장보를 겸직한 뒤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한 전 씨는 1978년 제1보병사단장으로 취임했다. 군내에선 ‘진급 지름길’이라고 꼽히는 요직이었다. 1979년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전 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학군단 교관으로 있던 5·16 군사정변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전 씨는 보안사령관으로 군 내외 정보를 틀어쥔 요직에 있었다. 그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7일엔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시켰다. 이튿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면서 새로운 독재의 등장을 예고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고, 8월 27일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장충체육관에 대의원을 소집해 제11대 대통령선거를 진행했다. 2524명의 대의원 전부가 독자 출마한 전두환 무소속 후보를 뽑았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 씨는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같은해 10월 27일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공포됐다. 1981년 1월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로 이뤄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 씨는 90.2% 득표율로 당선됐다. 제5공화국의 본격적인 탄생이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5공 때였으면”이라는 말로 전 씨를 회상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부분이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는 취지로 말했다가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신군부를 앞세운 전 씨의 통치는 헤아리기 힘든 상처와 피해를 남겼다. 이로 인해 민주화 열망이 더욱 커진 것은 역설적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때 민간인 학살 논란을 빚으며 탄생한 전두환 정부에선 인권 침해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삼청교육대와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불리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구속 사건 등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에 대한 탄압도 극심했다.
언론과 기업을 탄압하고, 그 이면에서 부정부패가 횡행했던 대목도 5공의 그림자다. 전 씨 일가를 둘러싼 대규모 비자금 조성 논란, 친인척 비리 논란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정권 실세들과 사채업자들이 유착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사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는 북한을 막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639억 원가량의 국민 성금을 모금한 평화의댐 사기 논란, 전 씨 큰형인 전기환 씨가 정권 실세들을 동원해 노량진 수산시장을 강탈한 사건 등은 전두환 정부의 악명 높은 게이트 사건들이다. 전 씨 친인척과 정부 고위 관료들이 공권력을 남용해 사익을 극대화한 사례들로 국민 공분을 산 바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중의 눈초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국풍81’, ‘3S’ 등의 우민화 정책도 활용했다. ‘국풍81’의 경우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아 대학생들의 집단행동 규모를 위축시키려는 목적으로 계획한 문화 축제다. 3S는 영상(Screen), 스포츠(Sports), 성 산업(Sex)을 부흥시키는 정책이었다. 독재를 감추려는 목적으로 시행됐던 3S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문화·체육 발전 시발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외에도 전두환 정부 치부로 꼽힐 만한 수많은 사건이 존재한다. 키워드는 탄압, 은폐, 비리, 공작이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대한민국 사회에 각종 분열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두환 씨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며 권력을 내려놓은 뒤에도 ‘5공 청문회’,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 ‘추징금 미납 논란’ 등 숱한 이슈를 뿌렸다.
전 씨는 1997년 4월 각종 혐의에 대해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전 씨에게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 판결 이후 전 씨에 대한 전직 대통령 예우는 박탈됐다.
이후 전 씨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거주하다 2021년 8월 다발성골수종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1월 23일 사망했다. 퇴임 후 33년 만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은 점은 사망 시점까지도 그를 논란 중심에 서게 했다. 사망하기 전 광주 시민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사과 의사를 전달한 노태우 씨와는 비교되는 행보였다. 전 씨 사망에 대한 정치권 반응이 냉담한 이유다.
청와대는 노태우 씨 사망에 대해 국가장을 치르며 예우했다. 그러나 전 씨 사망엔 조화, 조문, 장례 지원 계획이 일체 없음을 단호하게 밝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홍준표 의원은 전 씨 장례에 조문 의사를 표현했다가 거두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전 씨 빈소는 대체로 한산한 가운데 육사 출신 측근 및 5공 실세 출신 정계 인사들이 일부 다녀갔다. 그 가운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1월 24일 전 씨 빈소를 찾아 화제를 모았다. 빈소를 찾은 반 전 총장은 취재진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모두 명암이 있다. (전 씨는) 특히 과가 많은 것은 틀림없다. 과오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며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많은 교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를 밝히지 않은 것은 안타깝다. 마지막에 (노태우 씨처럼)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