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는 몸 키우기, 민재는 수비기술 교육 초점…목표? 연령별 대표팀 맡아보면 어떨까 생각도”
박지성과 김민재가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디딘 시점은 17년의 차이가 나지만 이들은 같은 고등학교(수원공고) 출신이자 같은 감독 아래에서 축구를 배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요신문은 박지성과 김민재라는 당대 최고 스타를 키워낸 이학종 감독을 만나봤다. 이학종 감독은 수원공고에서 21년간 지휘봉을 잡은 이후 현재는 이천제일고 감독으로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다.
#일본 진출 1호 선수
이학종 감독은 선수 시절 국가대표에서 주축으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실력만큼은 인정받는 선수로 통했다. 이상윤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공격진영에서 기술적인 축구를 하는 선수였다. 왼발이 예리했고 당시로선 흔치 않은 스타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고려대 졸업 이후 김호 감독의 눈에 들어 실업구단 한일은행에 입단해 활약했다. 당시는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실업팀과 프로팀이 함께 경쟁을 하던 시기였다. 대학 졸업 이후 곧장 두각을 드러낸 그에게 다수의 프로 입단 제의가 쏟아졌다. 그를 품은 팀은 현대 호랑이(현 울산 현대)였다. 그는 "최강희 감독과 친했는데 고기 사준다길래 만났다. 그런데 양복 입은 구단 관계자들이 같이 왔더라. 그 자리에서 입단에 사인했다"며 웃었다.
현대에서도 주요 전력으로 활약했다. 리그에서 활약을 인정받고 1990 이탈리아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에 선발돼 예선전을 소화하기도 했다. 다만 부상으로 본선 무대에 나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대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그는 "세 분의 감독님을 모셨다. 조중연, 김호, 차범근. 다들 한국 축구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며 "감독님들과 관계는 다 좋았지만 차 감독님과는 축구 스타일에서 차이가 났다. 당시 감독님은 독일에서 돌아오신 직후라 선 굵은 축구를 구사하셨다. 내가 뛸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결국 이학종 감독은 일본풋볼리그(J리그 전신) 소속 코스모 석유로 이적을 선택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 1호가 나다(웃음). 나이 서른둘에 일본으로 갔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몸 상태가 좋았고 정말 즐겁게 뛰었다. 팀에서 인정을 받아 내 추천으로 김병수 등 한국 후배들을 입단시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세 시즌을 뛰고 그는 팀이 해체돼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의 선수생활은 일본 무대를 마지막으로 멈췄다. 하지만 현역생활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한국에 돌아오니 수원 삼성 구단이 창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감독이 은사님이신 김호 선생님이셨다. 팀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내가 베테랑으로서 활약해주길 바라셨다"며 "팀에 합류해서 훈련까지 하고 있었는데 수원공고에서 감독 제의가 왔다. 팀 성적이 안 좋을 경우 베테랑을 데려온 감독님이 비판받을 수 있다. 감독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길로 수원공고로 갔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이학종 감독의 지도자 생활이 시작됐다.
#몸을 키워야 했던 박지성
박지성은 이학종 감독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후 첫 제자였다. 그는 "감독을 맡기로 결정하고 받은 첫 신입생이 지성이였다"며 "원래는 다른 학교 진학이 예정돼 있었다. 그때는 아주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기에 중학교 동기 중 '에이스' 선수에 껴서 입학하려다 마음을 바꿔 수원공고로 왔다. 체격이 작아서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학종 감독은 박지성에 대한 첫 인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체격은 작았다. 그대로라면 경쟁력이 정말 없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이미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공을 다루는 능력 같은 부분은 고등학교 신입생으로선 최고 수준이었다. '이 선수에게 내가 해줄 것은 신체적 성장을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을 가르치기보다 잘 쉬고, 잘 먹어서 클 수 있게 했다. 훈련 안 하고 일주일, 한 달씩 집에 보내 쉬게 할 때도 있었다."
이 같은 박지성의 성장 과정에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 감독은 "내가 자꾸 애를 집에 돌려보내니까 지성이나 지성이네 집에서는 '축구를 그만두게 하려고 하나'라는 생각도 했나보다. 나는 그럴 일 없으니 잘 먹이기나 하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박지성은 기대대로 성장해나갔다. 이 감독은 "몸에 힘이 붙을 때까지 기다렸다. 2학년에 올라가서도 가끔씩 경기에 출전시켰고 3학년이 돼서 경기장에 풀어놨다"며 "결국 지성이가 3학년이 됐던 시기, 수원공고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이후 박지성의 스토리는 알려진 대로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고 곧 국가대표 유니폼까지 입었다. 이내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J리그에 진출했다. 이학종 감독은 "당시에 국내에선 여전히 지성이의 체격이 크지 않다 보니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도 기술이나 체력은 충분히 뛰어난 선수였다. 대학 진학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본 경험이 있는 내가 J리그 진출을 타진했다"며 "지성이를 알아본 사람은 허정무 감독이었다. 안목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지성을 고교 3년 동안 성장시킨 이학종 감독은 자신 또한 얻은 것이 많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지성이가 주축이 됐던 시기 전국대회 우승을 달성했고 '박지성 감독', '박지성 학교'로 이름이 나서 좋은 선수들이 뒤이어 입단했다. 수원공고에서 21년 동안 11회 우승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성이의 공이 어느 정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웃었다.
#포지션 변화 시킨 김민재
현재 아시아 정상급 수비수로 거듭난 김민재의 경우는 박지성과 다소 달랐다. 이학종 감독은 "경남 거제 지역 학교에 다니던 선수였는데 주변의 추천도 있었고 민재가 수도권으로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 대회장에서 약속을 하고 선수와 선수 부모님을 함께 만났다"면서 "당시 민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중3 때 176cm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도 키가 크시고 아버지가 아주 거구더라. 민재도 늘씬해서 충분히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 지역에서는 나름 실력도 있는 선수로 평가받았기에 입학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예상대로 김민재는 세계무대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 당당한 체구의 수비수로 성장했다.
김민재와 박지성의 육성 방향은 달랐다. 박지성의 신체적 성장에 공을 들였다면 김민재는 수비수로서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이 감독은 "민재가 중학교 때까지 주로 공격수로 뛰었다더라. 이따금 수비에 내려가는 정도"라며 "팀 상황을 봤을 때나 체격도 그렇고 수비수로 키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입학 이후 수비수로 포지션을 정해놓고 경험이 많지 않으니 수비에서 기술이나 노하우를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고 전했다.
이학종 감독은 김민재와도 우승을 합작했다. 당시 고교축구는 박지성이 뛰던 시절과 상황이 달랐다. K리그 구단들이 유스팀을 운영하며 유망주들이 K리그 산하 유스팀으로 몰려가는 시기였다. 이 감독이 이끌고 김민재가 뛰던 수원공고는 2014년 K리그 유스팀들도 함께 경쟁하는 고등 축구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 우승이 지도자 생활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이자 어려운 우승이었다. 일반 학원축구팀이 K리그 유스팀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다. 대건고(인천), 광양제철고(전남), 울산현대고(울산), 포항제철고(포항)를 차례대로 이기고 우승했다. 그 대회에서 민재도 한층 성장했을 것이다."
김민재는 수비수 본연의 덕목인 수비 능력 외에도 수비 지역에서 공격적으로 나가는 패스, 또는 공격적인 드리블에도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학종 감독은 "고등학교 때부터 민재는 그런 성향을 갖고 있었고 내가 요구하는 부분도 있었다. 공격수로 활약하던 아이라 어느 정도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며 "나 또한 선수 시절부터 그런 플레이를 즐겨 했다. 민재에게도 수비 지역에서 공을 잡으면 단순히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한다든가 전방으로 한방에 차내기보다 유기적으로 연결할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유소년 지도자로서 외로움
이학종 감독이 고교 축구에 몸을 담은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는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니 '한번쯤 대학이나 프로 무대 지도자로 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한다"면서도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계속 집중할 계획이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이 생활을 하겠나"라며 웃었다.
그는 경력이 쌓여가며 지도자로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그는 "나이를 먹으니까 동료 지도자들 중 이제는 연차가 많이 차이 나는 후배들이 늘어났다. 젊었을 때는 동료들과 어울리는 자리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별로 없다"며 "훈련을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고 전했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는 것은 '그림'이다. 이학종 감독은 "축구를 하지 말고 그림을 그렸어야 하나 싶다"고 웃으며 "몇 년 전부터 우연히 관심을 가져 틈틈이 그림을 그려봤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이천제일고 사무실에는 곳곳에 그가 그린 그림이 벽에 결려 있었다.
지도자로서 선수들을 키워내는 보람도 빠질 수 없다. 그는 "고교축구 지도자라는 게 사실 엄청난 명예가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그저 선수들이 잘 성장할 때 느끼는 큰 보람, 그게 전부인 것 같다. 대학이나 프로, 대표팀에 간 제자들이 별일 없어도 가끔 안부 전화라도 하면 그게 그렇게 반갑다"며 웃었다. 이어 "나 또한 오래 정을 나눈 김호 선생님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덧붙였다.
올해 환갑을 지낸 이학종 감독은 조심스레 한 가지 목표를 이야기했다.
"내가 꼭 하겠다,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웃음). 가끔은 연령별 대표팀 같은 자리를 맡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20년 넘게 고등학교 선수들만 가르쳤다. 노하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어린 선수를 가르치는 지도자는 결국 선수의 미래를 보고 당장 기량보다 이 선수가 더 높은 무대에서 어떤 활약을 하게 만들어주는지가 중요하다. 해외의 경우 경험 있는 지도자가 어린 선수들 육성에 임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는 젊은 지도자들이 경험을 쌓는 자리 정도로 여겨져서 의아할 때가 있다. 물론 당분간은 지금 이천제일고에서 집중을 하고 싶다(웃음)."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