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성적 비결은 효진 언니 덕”…여가 시간 ‘논어’ 읽으며 멘탈 관리
프로 3년 차인 이다현은 데뷔 후 처음으로 주전 선수로 풀타임을 소화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롤 모델로 삼았던 양효진과 동고동락하며 선배의 장점을 보고 배우는 중이다. 속공은 물론 블로킹, 이동 공격에서 과감한 플레이를 구사하는 그의 꿈은 해외 진출. 여가 시간에는 논어 해석본을 들고 밑줄 쳐 가며 읽을 정도로 실력 외의 멘탈 관리에도 적극적이다. 1월 15일 경기도 용인 마북리에 위치한 현대건설 배구단 숙소에서 이다현을 만났다.
#양효진과 찰떡 케미 과시
인터뷰에 앞서 이다현의 개인 성적을 찾아봤다. 블로킹 횟수가 2019-2020시즌 세트당 0.324개, 2020-2021시즌 0.388개에 머물렀던 이다현은 올 시즌 세트당 0.71개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양효진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블로킹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블로킹뿐만 아니라 속공, 이동공격 성공률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이다현은 올 시즌 성적이 좋은 배경으로 “(양)효진 언니 덕분”이라며 미소를 짓는다.
“어렸을 때부터 효진 언니 경기 영상을 자주 찾아봤다. 어느 순간 내 마음 속 롤 모델로 자리잡았고 언니의 모든 걸 닮고 싶었는데 드래프트를 통해 현대건설에 입단하게 됐다. 그 순간 언니와의 인연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언니랑 함께 배구하면서 보고 배우는 게 엄청나게 많다. 언니도 많은 걸 알려주려고 한다. 블로킹, 속공할 때의 시야 확보 등 언니의 경험과 노련함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상황이 큰 행운이다.”
이다현은 중학교 때부터 경기 중 선수에게 볼을 주워 건네는 볼 리트리버(Ball Retriever)로 활약했다. 어린 나이에 프로에서 뛰는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었을까. 그는 중2 때 장충체육관에서 처음으로 실물 영접한 양효진을 잊지 못한다.
“현대건설 게임이 있는 날은 효진 언니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선수들이 코트에 나와 스트레칭하면 언니만 응시했던 것 같다. ‘볼보이’ 입장이라 선수한테 말을 걸 수 없었지만 그때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았던 시간들이었다. 당시 볼 리트리버로 활약했던 게 프로 배구 선수가 되는데 큰 동기 부여가 됐다.”
그만큼 이다현한테 양효진은 ‘신’적인 존재였다. 배구를 알면 알수록, 양효진의 배구를 보면 볼수록 이다현은 새삼 양효진의 대단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효진 언니는 노련한 시야를 가졌다. 그로 인해 상황에 따른 대처를 잘한다. 블로킹도 연습할 때 보면 놀라울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다. 그에 비해 나는 그냥 파워만 있는 센터 같다.”
#어머니의 배구 유전자
이다현은 배구를 늦게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발레를 했는데 키가 너무 커 6학년 때 배구로 방향을 돌렸다. 그가 배구를 선택한 배경에는 배구인 출신의 어머니 류연수 씨 영향도 한몫한다.
“엄마가 먼저 배구를 권유하진 않았다. 발레의 한계를 느낄 무렵 우연히 엄마가 배구 일로 통화하는 걸 듣고 자연스레 배구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늦게 시작한 덕분에 중학교 때 심하게 고생했다. 돌이켜보면 그땐 선수도 아닌 ‘생짜’나 다름없었다. 내 앞으로 공이 오면 다음 공격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키가 큰 것 외엔 좀처럼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는데 중앙여고 입학 후 조금씩 배구 선수의 틀을 잡아갔다.”
이다현은 어머니와 초·중·고까지 같은 학교 동문이다. 워낙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배구 선수 출신인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한다는 자괴감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 류 씨는 딸에게 배경을 잊고 배구에만 몰두하라고 조언했다.
#웜업존에서 코트를 향한 갈증 키우다
2019-20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현대건설 유니폼을 입게 된 이다현. 신인 때는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주전이 아닌 교체 멤버로 투입되다 보니 경기에 대한 갈증이 증폭되기도 했다.
“코트에 더 자주 나가고 싶었지만 내 현실은 웜업존에서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그 현실 인식으로 인한 괴리감이 나를 자꾸 힘들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나한테 풀타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체력 난조로 어려움을 겪진 않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 실패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걸 수정 보완해서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프로 1, 2년 차 때 후보 선수로 뛴 경험이 없었다면 이번 시즌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이다현은 어머니한테 경기 출전 시간이 적은 것과 관련해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 류 씨는 딸에게 잠깐의 출전 기회를 계속 경험으로 쌓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실력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번 시즌 이다현은 어머니의 조언을 피부로 느끼는 중이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교체 멤버로 투입됐을 때 내가 때릴 볼이 안 올라오면 볼 한 번 못 만져보고 다시 나와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올해는 경기 초반에 몸이 잘 안 풀려도 2, 3세트 때 몸을 풀고 경기 감각을 찾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전보다 경기를 대하는 면에 있어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일반적으로 여자 배구 센터들은 파워가 약하다는 편견이 있다. 그는 그 편견을 없애려고 고등학교 때부터 매일 한두 시간씩 벤치 프레스를 반복했다고 한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는 법도 없었고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벤치 프레스에 집중했다. 덕분에 이다현은 파워 넘치는 센터로 인정받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속공 플레이가 하고 싶었다. 외국의 센터들은 높은 볼을 때릴 때 쓰리 블록이 붙어도 그 사이를 뚫어내는 빠르고 강하게 공을 때린다. 나도 그런 공격을 보이고 싶었다.”
이다현은 185cm의 키를 자랑하는 정통 센터로 블로킹과 이동공격에 능한 장점이 있다. 1, 2년 차 때는 주로 원 포인트 블로커로 투입돼 블로킹을 잡아내거나 양효진에게 부족한 이동공격을 채워주며 현대건설의 다양한 공격 옵션을 만들었다.
강성형 감독 부임 후 포지션이 겹친 정지윤이 레프트로 이동하고 이다현이 미들블로커로 뛰면서 비로소 주전 자리를 확보했는데 이다현은 키만 큰 센터들과 달리 기본적인 운동능력이 뛰어나 A, B 속공이 들어오는 타이밍이 빠르고 이동공격에서도 뛰어난 기동력을 보여준다.
“이동공격은 내가 좋아하는 공격 옵션 중 하나다. 이동공격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세터와 많이 맞춰봐야 한다. 연구하고 훈련했던 노력들이 코트에서 결과로 나타났을 때 엄청난 보람을 느낀다. 속공 시 스냅으로 방향을 정하는 부분은 (양)효진 언니를 보고 배웠다. 언니의 속공은 각이 깊고 코트를 넓게 쓰는 편이라 어떻게 스냅을 써야 각이 깊이 들어가는지 항상 공부한다. 팀마다 블로킹, 수비 위치들이 다 다른데 블로킹하는 선수의 특징을 분석 후 공격에 임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무리 연구해도 잘 안 될 때가 있다. 특히 베테랑 선수들을 상대할 때가 가장 어렵다. 기업은행의 (김)수지 언니, 도로공사의 배유나, 정대영 언니 등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내가 어디로 때릴지 다 파악하고 미리 가 있더라. 그럴 때마다 ‘아, 언니들이 내 위에서 날고 있구나’ 하는 걸 절감하게 된다.”
이다현의 꿈은 해외 진출이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성인 대표팀에 뽑혀 라바리니 감독이 이끈 2021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 참가한 뒤 자신감을 가졌다. 당시 도쿄올림픽 최종 선수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국제 대회에서의 경험이 그가 해외 진출이란 꿈을 갖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21세 여자 배구 선수와의 인터뷰가 마치 베테랑 선수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다현이 왜 배구 팬들한테 사랑을 받는지, 지도자들이 왜 이다현을 향해 ‘엄지척’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