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말 학대, ‘용의 눈물’ 때도 관행…“강아지 며칠 굶기고…” 스태프들 죄책감 시달려
동물자유연대가 1월 20일 ‘태종 이방원’의 촬영 현장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며 동물학대 의혹을 제기했다. 영상에는 제작진이 극 중 이성계가 낙마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말의 다리에 밧줄처럼 보이는 와이어를 묶어 말을 강제로 넘어뜨리는 모습이 담겼다. 신호와 함께 고꾸라진 말은 고개부터 땅에 처박혔다가 뒤집어진 채로 다리를 몇 번 떤다. 말에서 떨어진 배우도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그러나 제작진은 별다른 조치 없이 피해 말을 대마 업체(전문적으로 말을 대여해 주는 업체)로 돌려보냈고 영상 공개 뒤 논란이 증폭되고 나서야 “일주일 후 말이 사망했다”며 말의 생사를 확인했다.
동물자유연대 측은 “2022년 대한민국 공영방송의 촬영이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현행 동물보호법은 ‘도박·광고·오락·유흥 등의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동물학대로 규정, 금지·처벌하고 있다. 또 이 같은 장면을 담은 영상을 촬영·게시하는 것도 동물학대로서 범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태종 이방원’ 측은 1월 20일 공식 입장문을 내고 결방에 들어갔다. 제작진은 “촬영 중 벌어진 사고에 대해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사과드린다. 사고는 2021년 11월 2일 ‘태종 이방원’ 7회에서 방영된 이성계의 낙마 장면을 촬영하던 중 발생했다”며 “낙마 장면 촬영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말의 안전은 기본이고 말에 탄 배우의 안전과 이를 촬영하는 스태프의 안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제작진은 며칠 전부터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준비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촬영 당시 배우가 말에서 멀리 떨어지고 말의 상체가 땅에 크게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100여 개 단체는 1월 23일 “KBS는 태종 이방원뿐 아니라 ‘정도전’ ‘연모’ ‘용의 눈물’ 등에서도 말을 고꾸라뜨리는 낙마와 살아있는 동물을 내동댕이치며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는 행위들이 촬영이라는 이름으로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다”며 “촬영장에서 이용된 동물들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투명하게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동안 방송에서 드러난 크고 작은 동물학대 연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종영한 tvN 사극 ‘철인왕후’에서는 여러 명의 출연자가 토끼 귀를 잡아들어 올린 장면이 논란이 됐다. 2019년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에서는 극 중 태후 역을 맡은 배우가 앵무새와 노느라 수업에 빠진 아들을 혼내기 위해 앵무새 꼬리에 불을 붙여 태워 죽이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앵무새를 키우는 일부 시청자들은 “앵무새를 묶어놓은 끈을 배우가 낚아채자 새가 소리를 내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에 제작사 측은 “불에 타는 장면은 동물학대 위험이 있어 CG(컴퓨터그래픽) 처리했다”고 해명했지만 불을 붙이기 직전까지만 촬영을 했다 해도 앵무새 꼬리에는 피지샘이 많아 불이 옮겨 붙기 쉽다는 지적이 나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법정제재인 경고를 의결했다.
미디어 종사자들에 따르면 촬영 현장의 환경이 동물들에게 높은 스트레스를 줬고 이에 대한 후속 처리도 미비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동물보호단체 카라가 미디어종사자 1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답변자의 약 60%가 ‘동물들이 촬영 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고 답했다.
개, 고양이, 말 등 비교적 소속이 분명한 동물은 촬영 이후 행방을 밝히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금붕어, 파충류, 야생 동물 등 촬영을 위해 구매하거나 직접 포획한 경우 후속 처리는 오롯이 제작부의 책임으로 남았다. 카라에 따르면 ‘촬영을 위해 동물을 구매했거나 포획한 적이 있다’고 답한 관계자 50% 가운데 22%는 ‘입양을 보냈다’고 대답하는 한편, 16%는 ‘업체에 되팔았다’, 8%는 촬영 후 행방을 ‘모른다’, 3%는 ‘사망했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촬영을 위해 동물에게 고의로 해를 가하는 상황은 종종 일어났다. 카라가 공개한 미디어 종사자들의 경험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영화 장면 묘사를 위해 거북이 등껍질을 벗겼다’, ‘촬영 중 놀란 말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전기충격기를 사용했다’, ‘새를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새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말이 갯벌로 나가야 하는데 말이 움직이지 않자 조련사가 매질을 가했다’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 경험담이다.
이런 일을 맡아서 해야 했던 말단의 스태프들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특히 예산이 적은 작품일수록, 메가폰을 잡은 사람의 동물권이 낮을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독립영화 전직 스태프 A 씨는 “인건비도 감당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에 동물 캐스팅이나 환경 조성에 돈을 들일 겨를이 없었고 스태프가 직접 동물을 구해왔다. 소품 리스트에 동·식물이 올라오면 너무 힘들었다. 한번은 말라비틀어진 식물이 필요했는데, 아침마다 그 화분에만 일부러 물을 주지 않으면서 서서히 죽였다. 가난한 주인공이 강아지를 키우는 장면에서는 강아지만 통통할 수 없으니 며칠간 강아지 밥을 주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3초도 되지 않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A 씨는 “가장 큰 문제는 동물권에 대한 결정권자들의 생각이라고 본다. 주인공이 동물이 아닌 이상 연출에서 동물이 꼭 필요한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체 가능하거나 삭제해도 흐름에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아집으로 촬영됐다. CG는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못했고 카메라 구도를 바꾸는 등의 방법에 대해서는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가진 제작진이 다수였다. 엄격한 가이드라인이 없이는 일분일초가 숨가쁜 현장에서 제대로 된 동물복지를 기대하긴 힘든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1월 25일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영상 및 미디어 촬영에 출연하는 동물에 대한 보호·복지 제고를 위한 ‘출연 동물 보호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가이드라인에는 동물의 생명권을 존중하고 소품으로 여겨 위해를 가하지 않아야 하며, 동물보호법상 관련 규정을 준수토록 하는 내용이 담긴다. 또, 출연 동물의 보호·복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위해 학대 행위의 범위 등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