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토끼 결집 효과 반면 ‘정권교체 프레임’ 우려…‘맞을수록 몸값 껑충’ 윤석열의 치밀한 계산?
발단은 윤석열 후보의 2월 9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였다. 윤 후보는 ‘집권하면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해야죠. 해야죠. 돼야죠”라고 답했다.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을 세 차례나 하며 의지를 나타냈다. 이어 윤 후보는 “문재인 정권에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도 법에 따라, 시스템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대선 정국에서 말을 아끼던 문재인 대통령이 포문을 열었다. 문 대통령은 10일 참모진 회의에서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 대상, 불법으로 몬 것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표한다. 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재직할 때는 이 정부의 적폐를 있는데도 못 본 척했단 말인가”라면서 윤 후보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날 문 대통령 발언은 청와대 내부에서도 화제가 됐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회의에 참석했던 한 참모가 ‘문 대통령이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며 발언한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대부분의 참모들도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한다”면서 “그동안 문 대통령 스스로가 정치 중립을 강조해왔는데도 불구하고 1야당 후보에게 메시지를 낸 것은 윤 후보 발언이 금도를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윤 후보 발언을 ‘정치보복 예고’라면서 문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검찰의 정치보복이 당연한 나라, 윤석열 사단이 득세하는 검찰공화국, 특수검사 만만세인 나라”라고 했다. 청와대 출신 민주당 의원 20명은 “3월 9일 대선 승리로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도 발표했다.
국민의힘은 투트랙 모드다. 윤 후보는 문 대통령의 강경 입장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도 늘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해왔다. (저와) 똑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의 사전에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한 발 물러섰다. 원칙적인 발언을 했을 뿐 현 정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는 취지다.
반면, 국민의힘은 현직 대통령의 선거 개입이라면서 응수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2월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국에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야당에만 극대노하는 선택적 분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썼다. 같은 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대선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발언을 굉장히 발끈하면서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의아하다”고 꼬집었다.
이를 지켜보는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 진영은 신중한 기류다. 이재명 후보는 “듣기에 따라서 정치보복을 하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매우 당황스럽고 유감스럽다”면서도 문재인 대통령 사과 요구와 관련된 질문에는 말을 아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후보와 대척점에서 부각되는 것을 놓고 내부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고 한다.
이 후보가 여권 지지층 집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란 관측엔 이견이 없다. 여권 주류인 친문 일각에선 여전히 이 후보에 대한 비토 목소리가 나온다. 이 후보와 경선에서 맞붙었던 이낙연 전 대표 지지층 중에는 ‘차라리 윤석열을 찍겠다’고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윤 후보의 적폐 발언으로 여권은 빠르게 ‘원팀’ 진영을 갖추는 모양새다. 초박빙 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레이스에서 이 후보로선 천군만마가 될 수 있다.
특히 ‘노무현 학습효과’가 다시 회자되면서 진보성향 부동층이 이 후보에게 쏠릴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민주당 의원들이 “검찰의 보복 수사 희생양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잊었느냐”면서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윤 후보 발언을 지렛대 삼아 등 돌린 ‘집토끼’를 끌어오겠다는 전략이다. 앞서 이재명 후보는 2월 6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 “참혹했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면서 눈물을 흘린 바 있다.
‘문재인-윤석열 충돌’이 이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관측도 만만치 않다. 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설 경우 ‘정권교체 프레임’이 대선 판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우려다. 머니투데이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2월 7~8일 실시한 여론조사(9일 공개, 표본오차 95%에 신뢰수준 ±3.1%포인트)에 따르면 정권교체 찬성은 54.6%, 정권유지는 37.5%였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이재명 후보는 그동안 ‘유능하고, 일 잘하는 이재명’을 앞세워 유세를 해왔다. 정권교체 여론이 높기 때문에 선택한 전략이었다.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닌 ‘이재명의 민주당’을 강조하면서 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노렸다. 이 후보 측 한 재선 의원은 “윤 후보가 부적절한 발언으로 도발하긴 했지만, 굳이 문 대통령이 대응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쉬운 측면이 있다”면서 “여권이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선거 판세만 놓고 봤을 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가에선 윤 후보 발언이 계산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윤 후보를 돕고 있는 한 원로 정치인은 “어차피 여권 지지층은 투표장에서 절대 윤 후보 안 찍는다”면서 “윤석열이 대선 후보로까지 오게 된 과정을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여권에서 공격할수록 윤 후보 몸값은 올랐다. 대선의 키를 쥐고 있는 중도층 상당수가 문 대통령에게 실망한 유권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논란이 윤 후보에게 손해만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