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절차 까다롭고 일부 은행 마케팅에 활용…“소비자 보호라지만 피로감 덜어줄 방법 모색해야”
한도제한계좌는 신규로 입·출금 계좌 개설시 한도를 낮게 설정하도록 하는 계좌를 말한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인출·이체 30만 원, 모바일뱅킹 등 전자금융거래 이체 30만 원, 창구거래 인출·이체를 포함해 100만 원으로 제한된다.
한도제한계좌는 2015년 금융사기 및 범죄 등에 사용되는 대포통장이나 보이스피싱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앞서 2012년 금융감독원(금감원)은 대포통장, 보이스피싱 사례가 늘고 있다는 이유로 은행연합회와 신규 통장 개설시 은행이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에는 미성년자와 외국인, 단기간에 여러 계좌를 만든 사람에게만 확인 서류를 받았다. 이후 2015년 이 같은 확인 서류 대상자가 모든 신규 통장 개설자로 확대됐다.
문제는 현장에서 지나치게 까다롭게 운영되다 보니 피해를 입는 소비자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돈이나 예금 등이 한도제한계좌에 묶여 불편을 겪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 한도제한계좌인지 몰랐다가 목돈이 묶였다는 사연이 소개됐다. 사연을 작성한 A 씨는 “목돈 들어 온 걸 한 계좌에 넣었는데 그 계좌가 한도제한계좌였다”며 “자금의 용처를 소명할 증빙자료를 가져오라고 한다. 잉여 자금인데 무슨 용처 증빙이 가능하겠느냐”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어 “모바일 뱅킹으로 동일은행에 예금 가입하고 평소 쓰던 출금 계좌를 해당 한도제한계좌로 돌렸더니 목돈을 받을 수 있었다”며 “뭐 이런 XX 같은 계좌가 있나. 내 돈 빼지도 못하고. 고액 입금되면 경고창이라도 띄우든지”라고 분개했다.
B 은행 관계자는 “(한도제한계좌 시행은) 대포통장, 보이스피싱 등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며 “부득이한 경우 은행 부지점장, 팀장 등의 결재를 통해 한도제한을 풀어주는 경우가 있다. 다만 문제가 생기면 창구 직원과 결재권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때문에 대포통장이 아니라는 확신이 100% 있어야 한도 제한을 풀어준다”고 말했다.
금융 소비자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정부 부처에서도 한도제한계좌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20년 5월 금감원과 금융위원회에 한도제한계좌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한도제한계좌) 제도의 법적 근거 마련 △금융사별 증빙서류 통일 및 간소화 △사전 안내 강화 등을 강조했다. 하지만 금융당국과 은행은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C 은행 관계자는 “고객 편의성대로 한다면 대포통장이나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이를 악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 소비자들의 원성은 이뿐 아니다. 한도제한계좌 해제시 서류제출에 불편함을 느끼는 고객에게 입출금 계좌나 신용카드 결제 계좌를 당행 계좌로만 지정하도록 하거나 카드발급 등을 권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 즉, 은행 실적에 도움이 되는 거래들을 이용하게끔 유도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NH농협은행 역삼금융센터점을 방문했던 최 아무개 씨는 “한도제한계좌를 해지하려면 자동이체 세 군데, 이를테면 휴대전화 요금 납부, 관리비 납부, 카드 대금 납부를 모두 NH농협은행을 통해 자동이체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며 “은행원이 정부 지침이라고 하길래 금감원에 전화했더니 ‘정부 지침이 아니다. 농협 내부 지침이다’라고 했다. 통신사들은 번호 이동하면서 혜택이라도 주는데 이건 은행들이 본인들 배 부르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최 씨는 금감원과 국민신문고에 NH농협은행을 상대로 민원을 제기했다. NH농협은행 관계자는 "은행 영업을 위해 하는 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한도제한계좌를 정부 지침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선 “지침이라기보다 (대포통장·보이스피싱 방지라는) 취지를 감안해 은행이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한도제한계좌 해지 요건이 은행별로 제각각인 점도 일부 금융 소비자들의 불만으로 꼽힌다. 근로소득을 얻는 직장인이 한도제한계좌를 해지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증빙 서류는 통상 재직증명서, 근로계약서, 구성원 명부(모임통장의 경우), 공과금 납입 영수증 등이다. 개인사업자나 법인의 경우 세금계산서와 사무실 계약 임대차계약서, 사무실 인테리어 영수증 등을 제출하는 비교적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된다. 또 근로소득이 없는 주부, 대학생 등은 공과금 납부 내역과 신용카드 사용내역 등을 내야 한다. 간혹 영업점마다 휴대전화 요금 납부명세나 등록금 고지서(대학생) 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각 은행별로, 심지어 같은 은행이라도 지점별로 해지시 요구하는 서류가 다르다. 금융당국은 한도제한계좌 해지 절차도 각 은행이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B 은행사 관계자는 “한도제한계좌를 쉽게 해지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면 이 제도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다”며 “금융사기범들에게 노출이 쉬워지는 순간 한도제한계좌의 원래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고 말했다. C 은행사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은행별로 한도제한계좌 개설 인원은 얼마나 되는지, 대포통장 또는 보이스피싱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평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도제한계좌를 해지하는 데 (은행이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건) 이런 평가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한도제한계좌 개설 인원이 몇 명 안 되는데 대포통장·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많으면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일각에선 대포통장 및 보이스피싱 등의 금융사기 수법이 다양해지면서 한도제한계좌로만 금융 소비자들을 보호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한도제한계좌를 대포통장, 보이스피싱 등을 막기 위해서 실행한다고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은행들이 있다”며 “금융범죄 방지 차원에서 단순히 ‘규제’만 하면 앞으로 더 진화할 금융범죄를 예방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도제한계좌 시행을 유지하되 소비자들의 피로감을 덜어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한도제한계좌와 관련한 번거로운 과정들 금융 소비자를 보호할 순 있다”면서도 “(은행사들이) 소비자들의 불만을 파악하고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