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잡은 왕밍완, 유창혁에 패해 준우승…조훈현 “요즘 산보 좋아” 고바야시 “AI 바둑 삼매경”
우승 직후 유창혁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승부를 했고 결과도 좋아서 기쁘다”면서 “올해는 이창호 9단을 비롯해 강한 후배들이 많아서 우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50세 이상 백전노장들의 무대
신안국제시니어바둑대회는 2019년 창설됐다. 만 50세 이상 백전노장들이 각축을 벌이는 대회다. 올해는 후원사 시드 1명과 각국 초청자 1명에 한해 만 45세 이상(1977년 이전 출생)도 출전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창호 9단과 중국의 창하오 9단이 혜택을 받았다. 나라별 구성은 한국 8명, 중국 3명, 일본 3명, 대만 2명.
현역이 아닌 왕년 총잡이들의 무대여서일까. 20일 열린 전야제 분위기는 팽팽한 승부의 긴장감보다는 여유와 웃음이 흘러넘쳤다.
각오를 묻는 질문에 조훈현 9단은 “옛날 같았으면 다 내 거라고 했겠지만, 이번 목표는 1승을 해내는 것”이라며 웃었다. 1953년생인 조훈현은 올해 일흔이 됐다. 최근 근황을 묻는 질문엔 “요새는 별로 할 일이 없어 산보를 많이 다닌다”고 했다. 조훈현의 동갑내기 라이벌 서봉수 9단은 “그래도 목표는 우승”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기자와의 비공개 대화에서는 “요즘은 바둑공부보다 유튜브 명 강의를 찾아 듣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유튜브를 시청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짧게 느껴진다”고 근황을 전했다.
이번 대회는 특히 2명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대만 대표로 출전한 왕밍완 9단과 일본의 노장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준우승에 머물긴 했지만 왕밍완의 활약은 올드팬들의 눈길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복병 왕밍완 9단 깜짝 활약
일본기원 소속의 왕리청과 왕밍완은 사실 한중일 외에 대만을 끼워 넣기 위한 구색 맞추기가 아닌가 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왕밍완이 보여준 활약상은 대단했다. 16강전에서 이창호 9단을 잡더니 8강전에선 창하오 9단, 준결승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9단 등 강력한 우승후보들을 차례로 꺾어 대회 관계자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창호와의 역대전적에서 4승 2패로 앞서고 있다는 소식은 취재 기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왕밍완은 재미있는 기록이 많은 기사다. 그는 1961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남동생 둘도 일본기원 소속 프로기사다. 또 하나뿐인 여동생은 프로가 되진 못했지만 대만 바둑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저우쥔쉰 9단의 14세 연상 부인이기도 한 바둑 가족이다.
전성기 조치훈 9단의 상대 중 한 명으로 우리 팬들에게도 익숙한 왕밍완은 2000년 제55기 본인방전 도전기에서 타이틀 보유자 조선진 9단을 4-2로 꺾고 생애 첫 타이틀을 쟁취한다.
당시 조선진은 본인방 10연패를 기록 중이던 조치훈 9단을 꺾고 권좌에 올랐는데 첫 방어전에서 왕밍완에게 타이틀을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조선진과 왕밍완의 본인방 도전기 1국은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렸는데 왕밍완이 초반 축을 착각하는 바람에 59수 만에 돌을 거둬, 일본 도전기 사상 최단 수수 불계패로 남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패배를 딛고 왕밍완은 결국 4승 2패로 첫 타이틀을 따내게 된다.
최규병 9단은 왕밍완 9단을 “시니어 바둑대회에 최적화된 기사인 것 같다. 일단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괴초식에 능하다. 이러면 속기 기전에 유리하다. 왕밍완 9단의 완력에 어릴 적 이창호 9단도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고 평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시상식에서 왕밍완은 “유창혁 사범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작년보다 좋은 바둑을 두고 싶었지만 결국 아쉬운 결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라며 해맑은 표정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조치훈 9단의 숙적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의 근황도 현장에서 화제가 됐다. 올해 만 나이로 70이 된 고바야시 9단. 요즘 오후 9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이 생활 리듬이라고 하는데, 기상하자마자 AI(인공지능)를 이용해 바둑공부를 다시 하는 것이 최근 사는 즐거움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바야시는 인공지능 바둑을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며 아주 잘 활용한다고 한다.
이창호 9단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대회 시작 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이 9단은 첫 판에서 복병 왕밍완 9단에게 발목을 잡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이창호는 훌훌 털고 일어나 현지 팬들을 위한 지도 다면기 행사에 나섰다. 전성기가 지났다고는 하나 패배는 언제나 아픈 것. 하지만 그는 그런 기색 없이 성심껏 팬들을 대했다. 대회장 한편에서 “역시, 이창호!”라는 나지막한 탄성이 들렸다.
신안국제시니어바둑대회는 그동안 개최 연도를 표기해 왔던 대회 명칭을 바꿔 올해부터 ‘제3회’를 붙였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단발성 이벤트에서 벗어나 대회를 이어가겠다는 신안군과 박우량 군수의 의지가 담겼다고 생각된다. 신안국제시니어바둑대회의 발전을 바란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