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에 보탬 되려 1루수 전향 결정…김현수 만나고 야구가 달라졌다”
채은성은 올 시즌을 앞두고 외야수에서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FA를 앞둔 선수 입장에선 도박과 같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1루수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채은성은 2016년 이후 매년 100경기 이상 출전하고 있을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나다. 2016, 2018, 2019년, 그리고 올시즌 3할 이상의 타율을 올린 그는 9월 5일 현재 타율 0.321 10홈런 120안타 76타점 출루율 0.378 OPS 0.857을 기록 중이다.
채은성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FA를 앞둔 속내를 들어봤다.
LG 트윈스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9월 5일 현재 1위 SSG 랜더스를 4게임 차로 뒤쫓고 있다. 와이어 투 와이어(단 한 차례도 선두를 내주지 않고 우승하는 것)를 목표로 하는 SSG로선 LG의 기세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닐 터. 채은성은 최근 LG의 팀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팀 주장인 (오)지환이가 솔선수범해주고 있고, 선배들도 후배들을 잘 이끌어준다. 1위와 게임 차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린 그걸 의식하기보다 매경기에서 승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결과가 나올 거라고 말한다. 요즘 더그아웃 분위기를 보면 지고 있어도 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그런 분위기가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LG는 리그 팀 타율과 OPS 부문 1위에 올라 있다. 채은성은 LG의 팀 타율이 1위를 이룬 배경으로 ‘타석에서 적극성’을 꼽았다.
“타격은 잘될 때도, 잘 안 될 때도 있다. 지난 시즌에는 타선 전체가 부진한 해였다면 올해는 타석에서 적극적으로 스윙하다 보니 장타율이나 타율 부문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채은성은 선발 출전하는 선수들이나 벤치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선수들도 모두 팀의 승리를 위해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볼 때 전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중심 타선이 흔들리면 하위 타선이 해결해주고, 하위 타선이 어려움을 나타내면 중심 타선에서 제 역할을 해주고 있는 상황들이 성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채은성의 메신저 프로필을 보면 ‘신한불란(信汗不亂)’이란 사자성어가 눈에 띈다. ‘자기가 흘린 땀을 믿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인데 채은성한테 이 사자성어는 중요한 의미를 안겨준다.
“지난 시즌 도쿄올림픽 휴식기를 앞두고 부상을 당하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다. 당시 투수 파트의 이정용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정용이한테 사자성어를 부탁했다. 마음에 담고 있으면 힘이 날 만한 내용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정용이가 ‘신한불란’이란 사자성어를 보내줬다. 그 의미가 많이 와 닿았다. 야구가 멘탈 게임이기도 한데 무조건 노력해야 한다는 말보다 내가 흘린 땀을 믿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힘든 시기의 내게 위로로 다가왔다.”
주로 우익수를 맡고 있던 채은성은 올시즌을 앞두고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포지션을 조정하고 나니 박해민이 FA를 통해 중견수로 합류했다. 좌익수 김현수, 중견수 박해민, 우익수 홍창기의 조합이 완성된 것이다.
“지난 시즌 김민호 코치님이 수비 코치를 맡고 계실 때 전반기 끝날 무렵 코치님이 조심스레 수비 변경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때 박해민이 영입될 줄 몰랐던 상황이었다. 코치님은 외야보다 1루를 맡는 게 팀과 개인을 위해서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주셨다. 사실 처음엔 코치님의 이야기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포지션 변경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지 않나. 그러다 코치님의 조언을 따르기로 하고 스프링캠프를 맞이했는데 사실 걱정이 많았다. 이전에 1루수를 맡은 경험은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 팀의 수비 잘하는 오지환이 많은 노하우를 알려줬다. 상황에 맞는 내야 수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덕분에 서서히 1루수 자리에 적응해 갈 수 있었다.”
채은성은 자신의 야구를 ‘김현수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한다. 김현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한 2018년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현수 형이랑 처음으로 같이 야구를 해봤는데 정말 야구에 진심인 선수라는 걸 느꼈다. 나보다 이룬 것도, 해놓은 것도 많은 선수인데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한 노력은 노력도 아니었다는 자괴감이 들더라. 2018년 현수 형과 함께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새벽조로 움직이며 야구를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그 노력과 정성이 타율 3할3푼1리 25홈런 119타점이란 성적으로 나타났다.”
2009년 LG에 입단할 당시 채은성은 육성 선수 신분이었다. 일반 선수들이 두 자릿수 등번호를 달 수 있다면 육성 선수들은 세 자릿수 등번호를 받는다. 당시 채은성의 소원은 1군이 아니었다. 자신의 유니폼에 두 자릿수 등번호를 붙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등번호 102번을 달았다. 그러다 2014년이 돼서야 정식 선수로 등록됐고, 비로소 두 자릿수 등번호인 54번을 받았다. 내가 고른 게 아니라 남아 있는 번호 중 하나를 받았는데 그때는 어떤 숫자인지보다 두 자릿수라면 다 괜찮았다. 오랫동안 그 순간만 기다렸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채은성이 정식 선수가 되기까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군 복무를 마치고 퓨처스리그에 들어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경기를 치르다 투수한테 공을 던지지 못하는 ‘입스’ 증상이 나타난 상황이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상태라 연습량이 부족했다. 하루는 배팅볼을 던지다 타자 등에 공을 맞춘 적이 있었다. 그 후론 공을 던지지 못했다. 일명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을 겪은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식 선수로 등록됐기 때문에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이후 채은성은 드라마와 같은 굴곡진 야구 인생을 보냈고, 어느 새 FA를 앞둔 시즌을 치르는 중이다. 최근 채은성은 기자들과 인터뷰 때마다 FA 관련 질문이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위에서 자꾸 물어본다. 얼마 받을 거냐고. 얼마면 되냐고 말이다. 그런데 내가 1군에서 선수 생활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FA는 진짜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1군에서 야구를 오래하고 싶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래서 막상 FA를 앞두고 보니 이 또한 실감이 안 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FA와 관련해서 아내랑 이야기해본 적도 있는데 답을 내진 못했다.”
채은성을 두고 벌써 여러 팀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 아직은 소문일 뿐이지만 일부 팀은 꽤 구체적인 이유들로 인해 채은성을 영입하고 싶어 한다. 채은성도 언론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다고 말한다.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 들은 내용들이다. 어떤 팬이 제 얼굴과 다른 팀 유니폼을 합성해서 야구 커뮤니티에 올려놓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팀을 좋아하는 일부 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선수에게 보이는 관심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채은성은 올시즌을 앞두고 지난 시즌 대비 6.7% 삭감된 2억 8000만 원에 연봉 계약을 했다. FA를 앞둔 해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시즌을 준비했지만 초반에는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돌이켜보면 매 시즌 4, 5월 성적이 안 좋았다. 그래서 걱정하기보단 특타를 하면서 보완해나가려고 노력했다. 원래 여름을 좋아한다. 날씨가 따뜻해진 6월부터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호준·모창민 코치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자신감을 회복했던 게 계속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인터뷰 말미에 채은성에게 FA란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난 지금도 내가 1군 경기 첫 타석에 섰을 때의 그 가슴 벅참을 잊지 못한다. 너무 좋아서 말로 표현 못한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그런데 이 FA는 ‘좋다’는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육성 선수로 프로에 들어와 굴곡진 야구 인생을 영위해온 데 대한 보상인 것 같다. 나도 고생했지만 아내, 가족들, 그리고 날 도와준 많은 지도자들, 선수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FA는 나한테 감사함의 의미를 안겨준다.”
채은성은 마지막으로 LG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FA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지금은 LG의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팬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우리 팀 우승에만 전념할 것이다. FA는 시즌 끝나고 정리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