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엽이 형 감독한단 말에 처음엔 농담인 줄…내 운명은 이미 부산으로 방향 옮긴 터라 함께 못 해”
2000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 후 한화와 두산을 거쳐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배 코치는 프로 통산 20시즌 499경기 138승 122패 3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4.46으로 2000년대 KBO리그를 대표하는 오른손 투수였다. 삼성에서 한국시리즈 7회, 두산에서 1회 우승을 거머쥐며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만 8개를 갖고 있는 배 코치는 현역에서 은퇴 후 2020년부터 두산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지난해와 올해는 1군에서 불펜코치와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김태형 감독의 퇴장과 함께 두산을 나온 배영수 코치. 롯데 코치를 맡게 됐다고 발표난 지 이틀 후 두산은 배 코치가 좋아하는 ‘승엽이 형’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한다고 밝혔다.
19일 김해 상동야구장에서 마무리 캠프를 진행하고 있는 배 코치를 만났다.
처음부터 이승엽 감독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삼성 초기 왕조를 이끌었던 친한 선후배가 두산에서 감독과 코치로 재회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배영수 코치는 ‘승엽이 형’이 두산 신임 감독을 맡게 될 줄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처음 얘기 들었을 때는 장난인 줄 알았다. 승엽이 형이랑 그 전에 통화할 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다 내가 감독되면 어떻게 할래?”라고 말해서 나도 장난식으로 받아쳤는데 농담이 현실이 되더라. 물론 두산에서 승엽이 형과 함께했다면 그 또한 소중한 기회였겠지만 내 운명은 이미 부산으로 방향을 옮긴 터라 아쉬움은 없는 대신 승엽이 형한테 죄송한 마음이 있다.”
배 코치가 롯데로 자리를 옮긴 배경에는 성민규 단장이 존재한다. 초·중 1년 후배인 성 단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깊은 배 코치는 성 단장으로부터 처음 부탁을 받았고, 성 단장의 진심어린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워 부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두산을 떠나 롯데로 오는 게 쉽진 않았다. 나한테 두산은 가족 같은 팀이다. 구단 직원분들, 단장님, 사장님 모두 나를 아껴주셨다. 두산에서 많은 걸 받았고,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그걸 다 갚지 못한 채 마음의 빚을 안고 나와야 했다.”
그래서 배 코치에게 이런 질문을 건넸다. 만약 김태형 감독이 두산과 재계약했다면 계속 남아 있었겠냐고. 그는 바로 대답했다.
“남았을 것 같다. 감독님이 계셨다면 나도 거기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감독님들 중 한 분이 김태형 감독님이다. 그런 분이 팀과 동행하지 못했고, 나도 자연스레 거취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배 코치는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롯데 투수들에 대해 “지금 몇몇을 빼면 대부분이 C급도 안 되는 D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새로운 팀을 맡는 코치들이 그 팀의 선수들에 대한 평가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과 달리 배 코치의 ‘D급’ 발언은 다소 직설적이었다.
“내 성격이 빙빙 돌려서 말하지 못하는 편이다. 당시 인터뷰 중 고민 끝에 그런 표현이 나왔는데 몇 년 동안 성적이 부진했다면 분명 문제가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막상 롯데 선수들을 만나보니 정말 착하더라. 그런데 나는 착한 선수보다 투지와 열정이 있는 선수를 더 좋아한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많이 해본 삼성과 두산의 특징은 선수들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선수가 지기 때문이다. 롯데도 그렇게 움직이길 바란다. 선수들과 며칠 함께 훈련하며 그 가능성을 봤고 희망을 부풀리게 됐다. 그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배 코치는 선수 시절을 포함해 많은 지도자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다. 김응용, 김성근, 류중일, 선동열 감독을 비롯해 당시 코치였던 이강철, 김상진, 김태한, 양일환, 계형철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
“다른 감독님들은 선수 시절 만났던 분이고, 김태형 감독님은 선수와 코치로 경험한 지도자인데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코칭이 여러 감독님들과 김태형 감독님한테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선수에 대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없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선수들을 먼저 판단하고 평가하기 전에 뒤로 물러나 지켜볼 줄 알아야 하며, 선수의 단점은 바로 그 자리에서 피드백해주는 부분 등이 선배 지도자들한테 배운 점들이다. 코치가 되고 나서 깨달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삼성 시절 선동열 감독님이 내게 냉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리고 한화에서 재회한 김성근 감독님이 내게 보이지 않게 배려해주셨다는 점 등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배 코치는 삼성에서 선동열을 투수 코치로 처음 만났다. 2004년 17승 2패의 놀라운 성적을 올리며 선동열의 관심을 한몸에 받다 2007년 팔꿈치 수술 후 2008년 복귀해선 추락을 거듭했다. 그 무렵 선동열과 갈등을 빚었다. 선수 때는 선 감독에 대해 원망도 컸지만 코치가 된 배영수는 당시 선 감독이 자신에게 혹독하게 대한 배경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코치가 되고 나서 선동열 감독님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독님께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감독님도 잘 받아주셨다. 김성근 감독님과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았다. 2016년 팔꿈치 수술과 재활로 힘든 시기를 보내다 6개월 만에 1군으로 콜업이 됐다. 그런데 1군에서 한 게임도 못 나가고 다시 2군행을 통보 받았다. 그 즉시 감독실을 문을 열고 들어가 김성근 감독님께 공 하나라도 던지고 2군 내려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안 된다고 거절하시더라. 순간 욱하는 마음에 이 기분으로 운동 못하겠으니 며칠만 쉬겠다고 하고 나왔는데 3일 쉬고 서산에 갔더니 매니저가 집에 돌아가라는 김성근 감독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즉시 울산 롯데전을 위해 울산에 계시는 감독님을 찾아가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빌었다. 정말 죄송했다고, 제 생각이 짧았다며 한 번만 봐달라고 말씀드렸다.”
이후 김성근 감독은 배영수에게 “앞으로 1년 동안 눈 감고 귀 닫고 야구만 해라”라며 35세 베테랑 투수를 나이 어린 유망주들과 함께 일본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보냈다. 배 코치는 “당시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는데 일본 가서 일본 고참 선수들이 어린 선수들과 함께 교육리그에서 뛰는 걸 보고 내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당시 한화의 마무리 캠프가 미야자키에서 진행됐다. 감독님이 마무리 캠프를 위해 미야자키로 들어오셨고, 난 교육리그를 마치고 마무리 캠프에 합류했는데 캠프 마지막 날 공 200개 던지고 감독님께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드리니까 감독님이 내게 처음으로 고생했다고 말씀하시더라. 이듬해(2017년) NC와의 홈 개막전에 선발 등판해 6-0 완승을 거두며 604일 만에 승리 투수가 됐다. 그때 알았다. 감독님의 시선은 항상 지금보다 더 먼 미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김성근 감독님은 내 야구 인생의 은인이다. 감독님 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가장 재미있게 야구했던 시절이었다. 감독 김성근처럼 멋진 지도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인터뷰 말미에 배 코치는 2019시즌 한국시리즈 4차전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우승을 확정 짓고 포수 박세혁과 감격의 포옹을 나눴던 장면을 떠올렸다.
“아마 프로 야구 선수들 중 나처럼 헹가래를 받고 은퇴한 선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발표는 안했지만 2019년을 끝으로 은퇴할 계획이었던 터라 김태형 감독님이 10회 연장전에 내게 마지막 등판 기회를 부여했을 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워낙 몸을 잘 만들었고, 팀의 우승을 확정짓는 데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박병호를 삼진으로, 제리 샌즈를 투수 앞 땅볼로 돌려세우고 우승을 확정 지은 후 포효한 장면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미련 없이 은퇴할 수 있었다.”
다시 롯데 이야기로 돌아왔다. 배영수 코치는 롯데의 젊은 투수들, 그중 올 시즌 어려움을 겪은 김진욱이란 이름을 꺼냈다.
“진욱이가 불펜에서 피칭하는 걸 보니 스트라이크도 잘 던지고 변화구도 빼어났다. 그런데 마운드에서 잡념이 많아 보였다. 진욱이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계속 부딪혀야 한다. 한 번 부딪혀서 안 되면 또 부딪혀야 한다.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프로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투수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마인드가 강해야 살아남는다. 앞으로 그런 선수들을 많이 보고 싶다. 나 또한 그런 선수들을 도울 수 있는 코치이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