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이어 디즈니+까지 활동 무대 확장…“이제는 나도 해외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처음 ‘형사록’의 대본을 받았을 때 원제는 ‘늙은 형사’였어요. 그냥 형사도 아니고 늙은 형사의 ‘늙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죠. 먼저 외모나 의상, 머리 스타일을 ‘늙음’에 포커스를 맞춰서 준비한 기억이 나요. 제가 원래 머리카락이 힘이 없고 부드러운 스타일인데 빳빳한 직모로 잔뜩 뻗치게 해서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죠. 옷도 보면 옛날 스타일의 큰 옷을 입고 있는데, 택록의 과거 트라우마가 생기는 지점부터 시작해서 정체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의도한 스타일이에요.”
지난 11월 16일 시즌 1이 마무리된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형사록’은 한 통의 전화와 함께 동료를 죽인 살인 용의자로 몰리게 된 형사가 정체불명의 협박범 ‘친구’를 잡기 위해 자신의 과거 행적을 뒤쫓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성민은 금오경찰서의 전설적인 형사로 후배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지만, 과거 범죄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형사 택록 역할을 맡아 갑작스럽게 살인범으로 몰리면서도 유능한 형사로서의 감을 발휘해 진범을 압박하는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펼쳐 호평을 받았다.
“택록은 어떤 형사보다도 스마트하고, 굉장히 유능하기에 언제든지 출세할 수 있는 형사였다고 생각해요. 그 배경에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한 성격이 있었을 거고요. 한편으론 굉장히 외로운 캐릭터죠. 혼자 고시원에 살고 있는데, 그 신을 찍을 때마다 외로웠어요(웃음). 고시원 신 촬영은 워낙 좁은 공간에 스태프 수십 명이 들어오는데, 그때가 또 하필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였거든요. 촬영하면서 마스크를 벗을 때마다 ‘오늘은 (코로나19에) 걸리겠구나’ 생각했죠(웃음).”
‘형사록’은 택록을 제외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금오서에 새로 부임한 뒤부터 택록에게 묘한 경계심을 드러내 보이는 수사과장 국진한(진구 분)부터 택록을 존경해 금오서까지 따라왔다는 막내 형사 손경찬(이학주 분), 택록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후배 형사 이성아(경수진 분)까지. 이들 뿐 아니라 택록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어디 하나씩 의뭉스러운 부분을 지니고 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다.
“리뷰를 봤는데 ‘이게 모두 택록이의 환상, 망상이다’라는 분석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또 ‘친구’의 목소리를 여러 배우들의 목소리를 합쳐서 만들 것이란 추측도 있었고요. 어떤 분은 경수진 씨가 친구일 거라고 보시고, 또 어떤 분은 이학주 씨가 친구라고 생각하시고…. 저희 이야기 속 배우들이 모두 ‘내가 범인인지도 몰라요’ 하면서 시청자들을 홀리는 부분이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 시켰던 것 같아요. ‘형사록’의 재미있는 특징 중 하나죠.”
발로 뛰는 형사의 역을 맡아서인지 ‘형사록’ 안에서 이성민은 유독 뛰는 연기를 많이 했다. 몸으로 맞붙는 액션 연기가 힘에 부칠 나이라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빼거나 사리는 일 없이 전부 자신의 힘으로 해냈다고 한다. 그 덕에 살짝 위험 지수에 올라 있었던 당 수치가 정상으로 내려갔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제가 당뇨 환자는 아니고요, 병원에 갔더니 당 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었거든요.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형사록’ 촬영하고 병원에 갔더니 당 수치가 정상이 됐다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도 놀라서 ‘운동하세요?’ 그러시는데 제가 운동을 원래 안 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정상이 됐지,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촬영할 때 하도 뛰어서 그 운동량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건강이 좋아진 것 외에 ‘형사록’이 이성민에게 안겨준 또 다른 즐거운 변화는 해외 반응의 체감이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로 해외에 나가보지 못해 해외 인기를 직접 실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넷플릭스에 이어 디즈니+까지 섭렵하면서 해외 매체들의 K 콘텐츠에 대한 열기를 제대로 느끼게 됐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이번 ‘형사록’ 때 제작 보고회를 마치고 해외 매체 인터뷰를 받았는데 엄청 많은 외국 기자 분들이 모이셨더라고요. 그분들이 ‘이성민 씨’ 하시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이분들이 날 아시나?’ 하면서(웃음). 그때 처음으로 해외에서도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참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국내 시청자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중요한 작품이라는 걸 느꼈어요. ‘미생’하고 ‘공작’으로 해외 촬영할 때도 그 나라 분들이 저희를 조금씩 알아 봐주시는 게 신기했는데, 이제는 저도 해외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이성민은 비슷한 나이와 연차의 중년 배우들 중에서도 빠르게 OTT 플랫폼에 적응한 배우로 꼽힌다. 넷플릭스 영화 ‘제8일의 밤’(2021)을 시작으로 올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과 디즈니+ ‘형사록’의 주연을 맡아 국내와 해외 시청자 모두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변화의 흐름에 빠르게 몸을 맡기긴 했지만, 여전히 신(新)과 구(舊)의 경계에 놓인 스크린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앞서 영화 ‘리멤버’를 개봉하고 나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영화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관객들은 극장에서 뭘 보고 싶어 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엔 OTT의 성장과 코로나19의 영향이 크죠. OTT에서 선보이는 드라마의 퀄리티도 정말 좋아졌고, 스태프들의 경계도 허물어졌거든요. 영화 스태프가 드라마를 찍고 드라마 스태프가 영화를 찍죠. 그러다 보니 관객들의 눈높이는 굉장히 높아졌고, 제작진과 배우들은 혼란스러워져요. ‘영화는 그럼 (드라마와 다른) 무슨 얘기를 해야 관객들이 그 돈을 내고도 보게 만들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지금도 하고 있죠.”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