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절차 도입한다지만 ‘입증책임’은 소비자에게…제조사가 소송비까지 부담하는 미국 사례 참고 목소리
#핵심 ‘입증책임’은 종전 그대로
국토부에서 지난 2022년 12월 26일 레몬법 제도 개선을 추진할 계획을 밝혔다. 국토부는 기존에는 교환 또는 환불 판정만 가능했던 것과 달리 중재 이전 조정 절차를 도입해 신속히 분쟁을 해결하고 보상, 수리 결정도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 소비자 선택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재규정 수락 시기를 '중재를 신청할 때'로 일원화하고 ‘자가진단시스템’을 구축해 차주가 스스로 교환·환불 요건을 충족하는지 점검한 후 중재를 신청할 수 있게 제도를 손볼 예정이다.
2019년 1월 1일 시행된 레몬법은 신차 구입 후 1년 이내에 주행거리 2만km 미만인 자동차에 동일한 하자가 반복해서 생길 경우 소비자가 제조사에 교환·환불을 요청하고,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다만 교환·환불 조건이 까다로워 그간 중재가 제대로 이뤄진 경우는 손에 꼽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중재 신청은 2019년 79건에서 2020년 668건, 2021년 707건으로 꾸준히 늘었다. 그러나 2021년까지 실제 중재 판정이 이뤄진 건은 170건뿐이었고 이 중에서도 교환이 이뤄진 건은 단 1건(0.6%)에 불과했다. 환불은 2건(1.2%), 화해는 11건(6.5%), 각하·기각 판정은 156건(92%)이었다. 이번 제도 개선 추진은 2021년 말 레몬법의 첫 실효성 검증에 착수한 국토부 나름대로 운영성과를 분석한 후 내린 보완책인 셈이다.
그러나 교환·환불 판정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적되던 ‘입증책임’ 문제는 종전 그대로 뒀다. 국내 레몬법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차가 출고할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점과 제조사 잘못으로 결함이 생긴 것이라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 차량을 인도받은 후 6개월 이내에 반복적인 하자가 발생할 경우 전자에 대한 입증 책임은 면제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비자가 입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이호근 대덕대학교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소비자가 차량의 하자와 관련해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단체나 기관이 전무한 곳에서 개인이 제조사를 상대로 책임소재를 다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2022년 4월 기준으로 지난 5년간 국토부와 각 지역 소방청에 급발진으로 신고된 건수가 987건에 달하지만 제조사가 과실을 인정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제조사 과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경우는 2018년 5월 호남고속도로 부근에서 발생한 ‘BMW 급발진 사건’ 단 한 건이다. 해당 사건 역시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아 최종적으로 제조사 책임이 인정될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호근 교수는 “1년에 2만km 미만이라는 제약 조건도 합리적이지 않다. 최근 자동차들이 대부분 5년에 10만km 미만까지를 보증 수리 요건으로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박한 기준”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수리 시 차주가 직접 ‘하자재발통보서’를 통해 차후 고장이 났을 경우 레몬법의 적용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지 않을 경우 레몬법 적용을 받을 수 없는 점도 꾸준한 독소조항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이번 제도 개선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은 제조사 상대로 한 변호사 소송비까지 공짜
한국형 레몬법은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레몬법이 기준이 됐지만 내용과 방식에는 차이가 크다. 미국의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 소송제가 활성화돼 있어 적극적인 교환·환불 조치 없이 차량 결함으로 인한 사고를 방치할 경우 천문학적인 규모의 금액을 배상하게 될 소지가 있다. 또한 미국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동일한 차종에 2~3차례 이상 결함이 발생할 경우 곧바로 조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제조사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에서는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입증책임을 진다는 점이 국내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결함의 원인을 명확하게 추정할 수 없을 경우 국내는 운전자 과실로 치부되지만 미국에서는 제조사 과실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문제가 생길 경우 조치가 훨씬 신속하다. 워싱턴DC를 포함한 미국 11개 주는 사망 혹은 심각한 상해를 유발할 수 있는 중대 하자가 1회 수리 후에도 재발할 경우 곧바로 교환·환불을 인정하고 있다. 반면 국내 레몬법은 제조사가 1회 이상 수리했으나 누적 수리기간이 30일을 초과한 자동차, 2회 이상 수리했으나 동일한 종류의 중대 하자가 재발한 자동차, 3회 이상 수리했으나 동일한 종류의 일반하자가 재발한 자동차에 한해 비로소 차주가 중재를 신청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레몬법으로 인해 소송에 돌입할 경우 소송비용 부담도 오롯이 결함 차량의 제조사가 진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변호사를 고용할 때 차주가 비용을 선불로 지불하거나 제조업체가 지불한 보상금의 일정 비율을 변호사에게 수수료로 제공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피해자가 잃을 게 없는 셈이다.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자분쟁조정위원인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국내에서는 소비자들을 보호할 마땅한 장치 없이 레몬법만 달랑 있는데 그마저도 불완전한 경우”라며 “제조사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 필요도 없기 때문에 보통 분쟁이 생기면 질질 끌면서 절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시간과 비용 면에서 소비자가 지쳐 분쟁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지적했다. 자동차 결함 피해자들을 위한 변호를 대리하는 법률사무소 나루의 하종선 변호사는 “최소한 신차 구입 후 1개월 내에 하자가 발생할 경우 무조건 교환해주고, 3개월 내에 하자가 생기면 하자가 있는 걸로 보고 입증책임을 제조사에게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국토부 관계자는 “피해자가 중재신청을 했을 경우에는 저희가 중재과정에서 한국자동차연구원 등에 직접 조사의뢰를 하는 일도 있어 제조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고 보지 않는다”며 “2021년까지 건수가 적었던 건 맞으나 2022년 8건의 추가 교환·환불 조치가 있었고 또 중재 프로세스가 워낙 길어 중간에 취하하시고 따로 제조사와 협의하시는 경우도 수백 건에 달한다. 저희가 중재 전에 조정이라는 제도를 도입한 취지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