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기 선발, 결승전 마무리로 마운드 올라…20대 초중반 주축 ‘영파워’ 세계 놀라게해
#오타니가 열고 닫은 원맨쇼
이번 WBC의 주인공은 단연 일본의 '야구 천재' 오타니 쇼헤이(29)였다. 투타 겸업으로 메이저리(MLB)에 돌풍을 일으킨 오타니는 이번 대회에서도 투타를 완벽하게 겸업했다. 투수로 3경기에 등판해 2승 무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1.86으로 호투했다. 9⅔이닝을 소화하면서 삼진 11개를 잡았다. WHIP(이닝당 출루 허용)는 0.72, 피안타율은 0.152였다. 타자로도 일본이 치른 7경기에 모두 출전해 타율 0.435(23타수 10안타) 1홈런 8타점 9득점으로 활약했다. OPS(출루율+장타율)는 1.345에 달했다. 오타니는 이견 없이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14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일본의 WBC 여정은 말 그대로 오타니로 시작해 오타니로 끝났다. 오타니는 지난 9일 중국과 WBC B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 선발 투수 겸 3번 타자로 나서 일본의 첫 공을 던졌다. 그리고 22일 미국과 결승전에서 9회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일본의 우승을 확정하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완벽한 스타트와 엔딩이었다. 오타니는 일본의 전승 우승을 이끈 뒤 "정말 꿈꾸던 순간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고, 매우 기쁘다"며 "일본뿐 아니라 한국, 대만, 중국 등 아시아와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야구가 더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원동력 삼아 달려왔기에 우리가 우승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오타니는 야구 실력뿐 아니라 인성도 '월드 클래스'였다. 세계 최고의 리그인 MLB를 평정했음에도 "일본에는 나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고, 대회 내내 늘 웃는 얼굴로 팬과 스태프와 동료들을 대했다. 자신을 삼진으로 잡은 투수가 '삼진 기념구'를 내밀자 미소와 함께 사인을 해주는가 하면, 야구 변방인 체코 대표팀이 일본전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소셜미디어(SNS)에 'RESPECT(존경)'라는 글을 올렸다. 특히 체코 선수들은 사상 처음으로 WBC 본선에 진출한 뒤 "오타니를 상대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감격했는데,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오타니가 미국 마이애미 공항에 체코 대표팀 모자를 쓰고 등장해 또 한 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오타니 vs 트라웃, 세기의 격돌 성사
이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었다. 전 세계 야구팬이 바랐던 오타니와 마이크 트라웃의 투타 맞대결이 WBC 결승전 종료까지 아웃카운트 1개를 남긴 상황에서 성사됐다. 심지어 스코어는 1점 차. '전설' 베이브 루스를 넘어 MLB에 투타 겸업의 신화를 쓴 오타니와 MLB 역사상 가장 비싼 계약(12년 4억 2650만 달러·약 5585억 원)의 주인공인 트라웃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렸다. 둘은 LA 에인절스에 함께 몸 담은 팀 메이트라 MLB에선 이들의 대결을 볼 수 없다. 오타니와 트라웃이 모두 WBC에 출전한 이번 대회가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기회였다.
일본이 3-2로 앞선 9회 초 투아웃. 일본의 간판 오타니와 미국의 캡틴 트라웃이 마운드와 타석에 마주 섰다. 오타니는 볼카운트 2B-1S에서 트라웃에게 시속 161㎞의 강속구를 던져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뒤 이어 또 한 번의 시속 162㎞ 강속구를 뿌렸지만, 이번엔 스트라이크존을 크게 벗어나며 풀카운트가 됐다. 숨을 고른 오타니는 6구째로 슬라이더를 택했고, 트라웃은 끝내 세 번째 헛스윙을 했다. 일본의 우승을 확정하는 삼진이었다. 오타니는 글러브와 모자를 그라운드에 벗어 던지며 포효한 뒤 동료들을 얼싸안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반면 트라웃은 마운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쓸쓸히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승자가 누구든, 둘의 승부는 WBC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MLB닷컴은 "지난 2월 WBC 최종 엔트리가 발표됐을 때 야구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타니와 트라웃의 매치업을 꿈꿨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자주 주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열광했다. CBS스포츠는 "마치 영화와 같은 스토리였다. '트라웃 대 오타니'가 우리 눈앞에 현실로 펼쳐졌다"고 감탄했다. 심지어 이날 주심을 맡았던 MLB 심판 랜스 박스데일은 "그 경기의 일부가 된 것만으로도 내겐 큰 축복이었다. 내 콜이 아닌, 투수와 타자의 승부로 경기가 끝나 다행이었다"라고 명승부의 여운을 만끽했다.
경기 후 오타니와 트라웃은 더 멋진 '다음 승부'를 약속했다. 오타니는 "긴장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다.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트라웃을 상대한 게 행운이었다"고 패자를 예우했다. 트라웃은 "우리 팀에는 힘든 밤이었다. 1라운드 승부는 오타니의 승리였다"고 결과에 승복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이 대회를 충분히 즐겼다. 다음 대회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설욕을 다짐했다.
#주눅들지 않은 일본 신예들
일본 대표팀의 간판은 MLB 스타플레이어인 오타니와 다르빗슈 유였다. 그러나 일본이 그들에게만 의존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건 아니다. 일본 프로야구(NPB)에서 뛰고 있는 20대 초중반의 신예들이 WBC 마운드와 타석을 지배하면서 '디펜딩 챔피언' 미국의 왕좌를 탈환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영 파워'였다.
실제로 일본 대표팀의 주축을 이룬 선수는 대부분 20대였다. 세대교체를 위해 의도적으로 젊은 선수들을 뽑은 게 아니다. 현재 기량이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뽑았는데, 그들이 20대였던 거다. 지난해 말 MLB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한 요시다 마사타카(29),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거포 오카모토 가즈마(27) 등 기량이 절정에 달한 선수들이 중심을 잡았다. 또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최연소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사사키 로키(22), 2년 연속 NPB 투수 5관왕을 달성한 야마모토 요시노부(25), 지난해 56홈런으로 일본인 타자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운 무라카미 무네타카(23)가 적재적소에 중요한 활약을 해냈다. 오타 다이세이(24), 도고 쇼세이(23), 다카하시 히로토(21), 이토 히로미(26) 등도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입증했다.
젊은 선수들의 압박감이 최고조에 달할 결승전에서도 일본의 신예들은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뽐냈다. 베테랑 선발 이마나가 쇼타가 2이닝을 소화하고 내려간 뒤 도고-다카하시-이토-오타로 이어지는 젊은 투수들이 트라웃, 폴 골드슈미트, 무키 베츠 등 MLB의 슈퍼 스타들을 상대로 무실점 릴레이를 펼쳤다. 타석에서는 무라카미가 2회 동점 솔로홈런, 오카모토가 4회 쐐기 솔로홈런을 각각 때려내며 공격을 주도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 재팬'은 이번 대회에서 성적과 세대교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미국, 꼼수에도 준우승
WBC는 현존하는 야구 국가대항전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MLB 사무국은 2006년 '야구의 세계화'를 표방하며 WBC 창설을 주도했고, 오직 WBC에만 현역 메이저리거들의 참가를 허용해 대회의 의미와 존재감을 키웠다. 그런데도 MLB 사무국은 이번 대회 8강전을 앞두고 돌연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대회 일정을 변경해 그 가치에 흠집을 냈다.
당초 WBC 조직위원회는 일본에서 게임 1(A조 1위-B조 2위)과 게임 2(B조 1위-A조 2위)를 치르고, 미국에서 게임 3(C조 1위-D조 2위)과 게임 4(D조 1위-C조 2위)가 열리는 8강 대진표를 짰다. 이어 4강에서는 게임 1 승자와 게임 3 승자, 게임 2 승자와 게임 4 승자가 맞붙게 했다. 개막 전의 유력한 예상대로 미국이 C조 1위, 일본이 B조 1위에 오른다면 두 나라가 결승전 전까지는 만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심지어 D조에는 우승 후보인 남미의 강호 도미니카공화국,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를 몰아넣고 미국과 같은 C조에는 남미 국가 중 상대적으로 덜 강한 멕시코를 배치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일본은 무리 없이 B조 1위에 올랐는데, 미국이 1라운드에서 멕시코에 덜미를 잡히면서 C조 2위로 밀렸다. 원래 대진표대로 편성할 경우 B조 1위 일본은 이탈리아와 게임 2에 나서고 C조 2위 미국은 게임 4에서 베네수엘라와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그 경우 게임 2 승자 일본과 게임 4 승자 미국은 결승이 아닌 준결승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일본의 결승 맞대결'을 노렸던 조직위의 목표가 무산될 위기였다.
결국 WBC 조직위는 '체면'을 포기하고 '실리'를 택했다. 미국이 멕시코에 패해 조 1위가 어려워지자 별다른 공지를 하지 않고 슬그머니 대진표를 수정했다. 합당한 사유 없이 미국-베네수엘라의 8강전을 게임 4에서 게임 3으로 변경한 것이다. 동시에 원래 게임 3으로 편성돼야 했던 C조 1위 멕시코와 D조 2위 푸에르토리코의 경기가 게임 4로 바뀌었다. 그 결과 4강에서 게임 1 승자 쿠바와 게임 3 승자 미국, 게임 2 승자 일본과 게임 4 승자 멕시코가 각각 맞붙는 새로운 대진이 탄생했다. 조직위는 이와 관련해 취재진의 지적이 쏟아지자 명확한 설명 없이 "원래 예정했던 대진대로 했을 뿐"이라고 어물쩍 넘겼다.
어쨌든 미국은 그렇게 결승에 오를 때까지 일본을 만나지 않았고, 4강 팀들 중 전력이 가장 약한 쿠바와 준결승을 치러 14-2로 크게 이겼다. 심지어 '대회 흥행을 위해 미국의 경기는 (현지시간으로) 토요일에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8강전 게임 3과 게임 4의 시간을 맞바꾸기도 했다.
반면 미국을 꺾고 C조 1위에 올랐던 멕시코는 이 같은 꼼수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1라운드를 마친 뒤 8강 장소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동했는데, 경기 날짜가 갑자기 하루 당겨지면서 여독을 채 풀지도 못하고 강호 푸에르토리코와 8강전에 나서야 했다. 또 준결승에선 쿠바 대신 우승팀 일본을 만나 접전 끝에 7-9로 역전패했다. 벤지 길 멕시코 대표팀 감독이 "우리에게 100% 불리한 일정"이라며 분통을 터트린 게 당연하다.
일본 역시 미국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었다. 준결승에서 멕시코를 힘겹게 꺾은 바로 다음 날, 하루를 푹 쉰 미국과 결승전에서 맞붙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끝까지 '미국 우승'의 조연이 되기를 거부했다. 3-2로 극적인 승리를 만들어내면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타선의 몸값 총액이 2억 달러가 넘는 미국은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도 일본의 마운드를 넘지 못해 '드림팀'의 자존심을 구겼다.
#부상으로 이탈한 디아즈와 알투베
뉴욕 메츠는 이번 WBC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구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겨울 MLB 마무리 투수 역대 최고액(5년 1억 200만 달러)을 주고 영입한 특급 소방수 에드윈 디아즈가 부상으로 올 시즌을 뛰지 못하게 됐다. 푸에르토리코 소속으로 출전한 디아즈는 도미니카공화국과 1라운드 D조 최종전에서 9회 마운드에 올라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았다. '지면 탈락'인 외나무 다리 매치에서 푸에르토리코의 5-2 승리를 지켜내고 8강 확정의 기쁨을 만끽했다.
바로 그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더그아웃에 있던 동료들이 환호하면서 마운드로 뛰어나왔고, 디아즈를 둘러싼 채 축하 세리머니를 했다. 그런데 껑충껑충 뛰던 디아즈가 갑자기 주저 앉으면서 오른쪽 무릎을 감싸고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기뻐하던 푸에르토리코 선수들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결국 부축을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간 디아즈는 휠체어를 타고 경기장을 떠났다. 병원 검진 결과 오른쪽 무릎 슬개골 힘줄이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아 다음 날 수술대에 올랐다. 재활을 마치려면 8개월이 필요하다.
베네수엘라 대표로 WBC에 참가한 호세 알투베도 부상을 피하지 못했다. 미국과 8강전에서 상대 투수 다니엘 바드의 시속 154㎞ 강속구에 오른손을 맞아 엄지손가락이 골절됐다. 곧바로 수술도 받았다. 알투베는 지난해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공수 핵심 전력이다. 데이브 브라운 휴스턴 단장은 "알투베가 최소 두 달 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각 팀의 핵심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하자 미국 현지에선 WBC 폐지론과 시기 조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즌 개막 직전 열리는 대회에서 크게 다치면 선수 개인뿐 아니라 구단의 한 시즌 농사까지 망칠 수 있어서다. WBC 출전 준비가 선수들의 1년 루틴을 흐트러뜨린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정작 선수들은 "괜찮다"는 입장이다. 미국 대표팀 리드오프로 활약한 베츠는 "부상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WBC 탓이 아닌 기이한 사고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메츠 소속인 피트 알론소도 "디아즈의 소식에 정말 마음이 아팠지만 운동선수인 우리는 매일 부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안타깝지만 부상도 경기의 일부"라고 했다.
MLB 사무국은 2026년으로 예정된 제6회 대회도 3월에 개최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