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송영길 통해 당 입지 넓혀…송영길 해법 두고 계파 간 미묘한 견해차
이재명 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2021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 때문이었다. 4월 17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 앞서 이 대표는 “최근 지난 전당대회와 관련해 불미스런 의혹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번 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당대표로서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사안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면서 “당은 정확한 사실 규명과 빠른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겠다. 이를 위해 송영길 전 대표 조기 귀국을 요청했다는 말씀도 드린다”고 했다. 이 대표는 “당이 사실을 규명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면서 “수사기관에 정치적 고려가 배제된 신속하고 공정한 수사를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을 둘러싼 돈봉투 의혹은 초접전 양상이었던 2021년 5월 민주당 전당대회가 무대다. 당시 당대표로 선출된 건 송영길 후보였다. 송 전 대표가 당권을 잡은 뒤 민주당 서울 서초갑 당협위원장이었던 이정근 전 부총장은 사무부총장 직함을 달았다. 핵심 요직으로 통하는 자리다.
돈봉투 살포 지시자로 지목받고 있는 건 윤관석 민주당 의원이다. 윤 의원은 송영길 지도부에서 당내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사무총장 직을 맡은 바 있다. 돈봉투 살포 의혹에 연루된 핵심 관계자 두 명이 송영길 지도부 사무총장과 부총장을 나눠 맡은 셈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은 송 전 대표가 돈봉투 관리에 개입된 정황이 담긴 녹취록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2022년 12월부터 프랑스 파리 그랑제콜 방문연구교수 직을 수행하고 있다. ‘정치계의 안식년’으로 불리는 해외 연수를 떠난 셈이다. 정치권 원로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큰 선거에서 패한 뒤 향후 거취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유력 정치인들은 해외 연수를 곧잘 떠난다”면서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지방선거 이후 미국으로 떠난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했다.
송 전 대표가 파리로 떠나기까진 많은 일이 있었다. 송 전 대표는 ‘돈봉투 살포 의혹’ 무대로 지목되고 있는 2021년 5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거머쥐었다. 압도적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던 ‘문재인 정부 여당의 재집권’이란 과제를 떠맡게 됐다. 당시 송 전 대표는 친문계 홍영표 의원과 박빙 승부를 펼쳤다. 비교적 계파적 색채가 옅은 송 전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관통하는 당내 주류였던 친문 당권주자를 꺾고 당대표가 됐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송 전 대표가 당권을 잡은 것엔 적지 않은 의미들이 내포돼 있었다”면서 “당시 친문 중심으로 짜여 있던 당내 질서에 변화 흐름이 감지된 것은 송 전 대표 취임 이후부터였다”고 되돌아봤다. 이 관계자는 “비교적 계파 색채가 옅었던 송 전 대표가 취임한 뒤 당내 권력 구도가 친문 일변도에서 양강구도로 재편됐다”면서 “결국 당내 구도가 친명과 친낙(친이낙연)으로 개편됐고, 그 뒤론 모두가 알다시피 친명계가 당내 주류로 자리매김했다”고 덧붙였다.
송 전 대표는 전당대회 당시엔 비문계 주자로 꼽혔고, 당대표 취임 이후엔 친명계에 가까운 행보를 이어갔다. 야권 내에선 당시 대선을 앞두고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는 분석이 잇따른다. 대선을 앞두고 송 전 대표는 ‘1일 1이재명 공부하기 캠페인’을 주도했다. 이재명 당시 대선후보 전과에 대해선 “공익적 활동을 하며 생긴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표가 대선에서 패한 뒤 당대표 직을 내려놓은 송 전 대표는 2022년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송 전 대표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직을 던지면서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었고, 송 전 대표 지역구엔 이재명 대표가 출마해 당선됐다.
이 같은 송 전 대표와 이 대표의 밀착 관계를 두고 ‘이심송심’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민주당 또 다른 관계자는 “이재명 대표가 당권을 쥐기까지 최고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인물이 송 전 대표”라면서도 “그러나 송 전 대표는 친명계 색채가 그다지 짙지는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송영길 전 대표가 휘말리기 시작한 돈봉투 살포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 대표가 공식 사과 의사를 표명한 것에 대해선 각종 해석이 나온다. 그동안 불거졌던 여러 사법 리스크에 대해 이 대표가 검찰의 야당 탄압 프레임을 내세웠던 행보와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초대형 악재라는 이 대표의 위기감이 반영됐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치권의 한 전략통 인사는 “단기적으론 이재명 대표가 ‘잘못한 것은 사과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방탄 국회의 주역이라는 꼬리표를 뗄 기회로 반전을 모색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악영향이 될 것이란 관측도 만만치 않다.
이 인사는 “공식 사과는 송영길 전 대표와 선을 긋는 것처럼 비칠 수 있어, 장기적으로 봤을 땐 이재명 대표에게 새로운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했다. 당 중진인 송 전 대표와의 연대를 통해 입지를 넓혀온 이 대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다. 돈봉투 의혹 수사가 진행될수록 본인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할 명분이 약해질 것이란 관측도 이 대표로선 부담이다.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은 정치권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인사다. 2022년 9월 이 전 부총장이 구속될 당시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이 전 부총장 구속 불똥이 문재인 정부 실세에게 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부, 청와대 등 유력 관계자 이름이 속속 거론되기도 했다.
2023년 4월 1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전 부총장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 6개월과 추징금 9억 8680만 8700원을 선고했다. 검찰은 이 전 부총장 혐의와 관련해 징역 3년을 구형한 바 있다. 법원은 검찰이 구형한 형량보다 더 과중한 처벌을 이 전 부총장에게 내렸다.
법조계 관계자는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면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3년은 집행유예가 나올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만, 법원이 판결한 징역 4년 6개월은 실형을 피할 수 없는 중형”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런 이례적인 현상은 이 전 부총장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주요 배경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2022년 10월 7일 이 전 부총장 법률대리인 정철승 변호사는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이 전 부총장을 향한 검찰 수사가 상당히 의도된 프로젝트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면서 “이 전 부총장을 교두보 삼아 다른 거물들을 잡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관련기사 ‘문 정부’ 겨눌 방아쇠?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 구속 ‘폭풍전야’).
당시 정 변호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서도 “이 전 부총장은 타깃이 아니라 교두보일 뿐”이라면서 “민주당은 이 심각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이제 민주당이 잘 감당해보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 변호사 발언 이후 6개월이 흘렀고, 전·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해 전직 당대표까지 이정근발 돈봉투 의혹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현재 20여 명에 가까운 민주당 의원들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송영길 전 대표에게 조기 귀국을 요청했다. 4월 19일 민주당 최대 의원 모임 ‘더좋은미래’ 또한 송 전 대표에게 조기 귀국을 요청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송 전 대표를 두고도 당내 계파 간 미묘한 견해차가 감지된다. 친명계에선 송 전 대표의 귀국 후 진상 규명에 우선순위를 두는 모습이다. 반면, 비명계에선 의혹에 연루된 인사들의 탈당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돈봉투 리스트’에 오르내린 의원들 상당수는 친명계로 파악되고 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