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단 27년 5개월 만에 처음 결승 무대 밟아…“오청원배 같은 세계대회 출전하고 싶어요”
권효진은 16강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이창호 9단을 꺾은 데 이어 이성재 9단과 이민진 8단을 차례로 누르고 입단 27년 5개월 만에 처음 결승 무대를 밟았다. 비록 유창혁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는 긴장한 탓에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권효진은 “입단 이후 가장 충실하면서도 즐겁게 승부에 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창혁에 패해 준우승
“나이가 들어서도 바둑 공부를 하려는 생각은 있었어요. 하지만 쉽지는 않았는데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안갯속에 가려 있던 수법에 대한 답을 정확히 알려주는 선생님이 나타난 것이죠. 그로 인해 기사들의 수명이 늘어났고, 저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권효진 7단은 1982년 국내 최초의 바둑도장인 ‘권갑용 도장’을 세운 프로기사 권갑용 9단의 장녀다. 권효진은 1995년 여자 입단대회를 7전 전승으로 뚫고 입단하며 국내 최초의 부녀 바둑기사로 화제를 모았다. 도장에서 같이 공부하던 이세돌 9단도 같은 해 입단했고 최철한, 원성진, 백홍석, 강동윤, 김지석, 박정환 9단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그의 동문 후배들이다.
일찍 입단했지만 주목받을 만한 성적은 내지 못했다. 2007년 전자랜드배 주작부 준우승 경력이 있지만, 그건 기전 속 미니기전이라 정식 기전이라 보기 어렵고 이번 대주배가 실질적인 첫 결승이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이었습니다. 예전에 이창호 9단, 서봉수 9단, 유창혁 9단, 김승준 9단 같은 분들은 제가 감히 넘볼 수도, 범접할 생각조차도 못했던 사범님들이었어요. 뭐랄까, 마주하고 앉아있으면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죠. 그런데 인공지능으로 공부한 다음부터는 상대가 누구든 사람을 상대하는 게 너무 편한 거예요.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고, ‘아, 나도 공부하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지만 유창혁 9단과의 결승전은 명성에 눌린 감이 있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대국 들어가기 전에 잠깐 얼굴을 뵀는데 저와 달리 긴장한 빛 하나 없이 너무 평온했어요. 사실 요즘 유창혁 사범님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연구생 정상급 선수들에게도 이긴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웃음). 반전무인(盤前無人·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대국에 임함)이 되지 않았으니 이길 리가 없었지요. 내용도 아쉬웠고. 후회가 남는 한판이었습니다.”
#딸 악지우 양 3대째 프로기사 꿈꿔
권효진은 10년째 여자바둑리그 부광약품의 감독을 맡고 있다. 올해 여자바둑리그는 7월 초 개막되는데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8개 팀이 순위 경쟁을 펼친다. 최근 성적이 너무 좋아 감독보다 선수로 뛰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궁금했다.
“감독이기 전에 프로기사니까 승부하고 싶은 생각은 항상 간직하고 있죠. 하지만 부광약품과의 오랜 인연을 함부로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겐 시니어리그도 있고 뛸 수 있는 무대는 많기 때문에 여자바둑리그까지 욕심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시니어리그에 처음 모습을 내민 권효진은 구전녹용 팀의 1지명으로 발탁돼,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가졌다. 정규리그 7승 6패로 첫 출전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 올해도 참가신청은 했다고 하니 어느 팀에서 어떤 성적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권효진은 현재 서울 서초구에 연구실을 내고 바둑 연구와 함께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원래 후진양성은 생각이 없었는데 얼마 전 작고한 부친 권갑용 9단의 부탁으로 2명의 제자를 받았다. 2명의 제자는 정하음 양과 정시우 군. 둘 다 장래가 촉망되는 연구생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지도했던 마지막 제자들이었습니다. 마음에 걸리셨던지 제게 직접 부탁하셨어요. 열심히 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제가 직접 밥도 해주고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학을 양성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아버지를 도와 바둑도장 운영도 참여해보고, 중국에서 실제 도장을 운영하기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인 바둑지도도 해보았지만 더 이상의 미련은 없습니다.”
최근 관심사는 할아버지, 엄마에 이어 3대째 프로기사를 꿈꾸는 딸 악지우 양(14)의 프로 입단 문제다. 현재 순천 바둑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악지우는 여자 연구생으로 유력한 입단 후보 중 하나다. 엄마의 예상으로는 내후년 정도 입단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승부의 길을 포기할 무렵 인공지능을 만나 요즘은 즐겁습니다. 과거에 꿈도 꿀 수 없었던 앞으로의 계획이란 것도 가져볼 수 있고. 향후 목표요? 글쎄…, 여자바둑 랭킹 톱10 안에도 들어보고 싶고, 세계여자바둑대회는 2003년 제1회 정관장배 이후 출전해보지 못했는데 오청원배 같은 세계여자바둑대회도 출전해보고 싶긴 하네요.”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