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피해 왔지만 ‘난민 불인정’ 판정…한국 난민법 시행 10년째에도 인정률 2.3% 저조
잠자리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없다. 출입국관리소는 난민 신청자들에게 매트리스를 지급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무는 출입국대기실은 사람들로 붐빈다. 매트리스를 펼 자리는 부족하다. A 씨는 비어있는 의자에 기대거나 누워 쪽잠을 잔다. 빨래와 샤워는 공용화장실에서 한다. 7월 12일 일요신문은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인 ‘왓츠앱’으로 A 씨와 인터뷰했다. A 씨는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토로했다.
#A 씨는 왜 한국으로 왔을까
A 씨는 카메룬 ‘앵글로폰’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1880년대 독일제국이 지금의 카메룬이 있는 지역을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인 독일제국으로부터 이곳을 양도받았다. 이때 영국 영향을 받은 문화권인 ‘앵글로폰’과 프랑스 영향을 받은 ‘프랑코폰’이 형성됐다.
1961년 두 문화권이 연합한 ‘카메룬 통합 공화국’이 탄생했다. 카메룬 10개 주 가운데 8개 주가 불어를 쓰는 프랑코폰 지역이고, 나머지 2개 주가 영어를 쓰는 앵글로폰 지역이다. 영어를 쓰는 사람이 카메룬에서 소수자인 셈이다.
불어권 인사들이 주도하는 카메룬 정부는 영어권 시민들을 탄압했다. 카메룬 정부는 1972년 영어권 주민들의 동의 없이 연방을 해체하고, 중앙집권 통치를 실시했다. 1984년 일방적으로 국명을 카메룬 공화국으로 바꿨다. 불어를 쓰는 교사들을 영어권 학교에 배치했고, 법원에서도 불어만 쓰도록 했다.
영어권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들은 거리로 나와 반대 시위를 벌였다. 카메룬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보내 시위를 진압했다. 2016년 11월 카메룬 군경은 영어권 시민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인 밤빌리 국립 공과대학교에 들어가 시위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카메룬 정부 강경 대응에 반발해 영어권 분리주의자들은 2017년 ‘암바조니아 공화국’을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내전이 발발했다. 2017년 이후 카메룬인 3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7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2018년 A 씨 아버지가 실종됐다. A 씨는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납치됐는지, 살해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A 씨는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아버지가 영어권 분리주의자들에게 잡혀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질병으로 먼저 사망한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실종되자 A 씨는 혼란스러운 카메룬에 홀로 남겨졌다.
몇 년 뒤 A 씨는 가봉으로 피신했다. 그는 “카메룬은 바나나와 토마토를 가봉으로 보낸다. 지인이 과일 트럭에 태워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봉에서의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가봉에도 난민혐오가 퍼졌고, A 씨는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길거리에서 A 씨를 검문했다. 돈을 내야 풀려날 수 있었다.
어느 날 가봉에서 사귄 친구가 한국은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라고 말해줬다. 그 말은 A 씨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됐다. A 씨는 주변 사람들 도움을 받아 한국행 비행기 표를 샀다. 가봉을 떠나 에티오피아를 거쳐 2022년 10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난민 인정 ‘하늘의 별 따기’
A 씨는 “길고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고 전했다. 그러나 난민 지위 인정 절차는 순조롭지 않았다. A 씨는 입국을 거부당했고, 난민 신청 절차를 밟게 됐다.
공항에 도착한 승객들은 입국 수속 절차를 거친다. 이때 A 씨처럼 입국 목적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걸러진다. 이때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사투가 시작된다. 난민 지위를 얻으면 내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난민 신청자들은 우선 난민 인정 신청서를 법무부 산하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에 제출해야 한다. 신청서가 회부 처리되면 서류는 법무부로 넘어간다. 법무부는 신청자들과 면담을 한 다음 난민 지위 인정 여부를 결정한다. 난민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신청자는 이의신청을 제기할 수 있다. 이의신청이 제기되면 난민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심의에서 탈락하면 신청자는 법무부에 난민불인정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거나 고국으로 강제 송환된다.
난민인권센터가 법무부 난민과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1년 기준 1차 심사가 나오기까지 평균 1년 9개월이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최장기 심사 기간은 4년 8개월이었다. 이의신청을 하거나 법무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할 경우 체류 기간은 더 길어진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경우도 드물다. 난민인권센터 분석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의 비율은 2022년 기준 2.03%였다. OECD 평균 24.8%와 큰 격차를 보인다.
심사에 불복해 법무부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대다수 난민은 필요한 법률 지원을 받기 힘들다.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이들을 대리할 변호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강제 추방을 당한다. 난민인권센터 소속 김연주 변호사는 “난민들이 민간 변호사와 연결될 기회가 거의 없고, 소수의 공익 변호사가 난민들 가운데 소수만 대리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A 씨도 난민 지위 확인 요청을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A 씨는 변호사를 선임, 난민 신청에 대한 불인정 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심에서 패소하며 체류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A 씨 대리인인 공익법센터 어필 소속 이일 변호사는 1심 판결에 대해 “재판부가 A 씨가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영어권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A 씨가 불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카메룬에서 소수자인 영어권 시민이 아니라고 봤다는 것이다. 불어권 시민은 탄압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이 변호사는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 가서 오랫동안 영어를 쓰지 않던 상황이라 불어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이러한 내용이 판결에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에 따르면 A 씨 아버지는 평소 A 씨에게 불어 사용을 권장했다고 한다. A 씨가 탄압 위험을 피하고자 갔던 가봉도 공용어가 불어다.
실제 A 씨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영어를 해석하는 데 능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A 씨는 영어로 묻는 말에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답변했다. 2심 공판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10월쯤 재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난민법 10년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2013년 7월 1일 난민법을 시행했다. 아시아 최초였다. 난민법 시행 10년이 지났지만 전문가들은 난민 신청자들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기회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진우 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논문 ‘한국의 난민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에서 “난민들은 정식 난민 심사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으며 외부의 조력으로부터 차단되고 있다. 위법한 강제송환과 여권 압수의 관행 등이 발생해 왔으며 불복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송환 대기실, 출입국 보호실 등에 갇히고 방치되는 극한상황에 놓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일 변호사는 “난민 인정률이 2.3% 수준으로 아주 낮은 상태다. 정부에서는 난민 신청자들이 다 난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신청자들에게 난민법이 정한 심사 기회를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난민을 추방하는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꼬집었다.
2022년 12월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출입국항 외부에 출국대기소를 설치·운영하는 내용을 담은 ‘출입국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아직 국회 계류 중이다. 난민인권네트워크 등 난민 지원 단체들은 6월 13일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9개월 동안 공항에서 머무는 A 씨는 건강 악화를 호소했다. A 씨는 “한 달 전부터 빵을 먹으면 배탈이 났다. 이제는 기내식이 나오는 점심만 먹는다”고 했다. A 씨는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도 없다. 병원에 가려면 A 씨는 먼저 인천공항 안에 있는 119구급대원에게 건강 상태를 검사받는다. 구급대원이 병원에 가야 한다고 판단하면 임시상륙허가가 내려지고 병원에 갈 수 있다.
A 씨는 이런 생활을 앞으로 얼마나 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한국이 인권을 보호하는 나라라는 희망을 놓지 않을 뿐이다. “난민들의 생활환경 개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위협을 느낀다면 더 나은 삶을 찾을 수 있는 나라로 갈 권리가 있다.” A 씨는 한국 정부가 자신의 존엄을 보장해 주는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