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도 타격 준비도 ‘빨리빨리’…전반기 정규이닝 평균시간 2시간 38분 기록
피치 클락은 투수가 공을 넘겨 받은 뒤 정해진 시간 내에 투구하지 않으면 페널티를 받는 규정이다. 올해 메이저리그(MLB) 경기 시간을 드라마틱하게 단축한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2011년 미국 대학야구에 처음 도입됐고, 마이너리그에서 효과를 실험한 뒤 올해 빅리그에서 처음 시행됐다. 시간 계산 착오를 피하기 위해 야구장 곳곳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피치 클락 전용 전광판도 설치돼 있다.
#피치 클락이 뭐길래
MLB 투수들은 올해부터 피치 클락 규정에 따라 주자가 없으면 15초, 주자가 있으면 20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한다. 또 투수가 주자 한 명당 견제도 2회까지만 허용된다. 세 번째 견제도 할 수는 있지만, 주자를 잡아내지 못하면 자동 진루권을 줘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두 번씩만 가능한 셈이다.
타자들에게도 피치 클락은 적용된다. 앞 타자의 타격 결과가 나온 뒤 30초 안에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 또 피치 클락이 작동된 후 주자가 없으면 7초, 주자가 있으면 12초 안에 완전히 타격 준비를 끝내 투수에게 최소한 8초의 시간을 확보해줘야 한다. 타석당 '타임'도 한 번만 할 수 있다. 페널티도 공평하다. 투수가 규정을 어기면 볼로 판정되고, 타자가 위반하면 스트라이크다.
KBO리그가 이 규정을 빠르게 받아들이기로 한 건, MLB가 실제로 피치 클락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올해 MLB 전반기 정규이닝(9회) 평균 시간은 2시간 38분으로 지난해 3시간 4분, 2021년의 3시간 9분보다 많이 줄었다. 1984년 이후 39년 만의 최단 시간 기록이다. 심지어 지난 4월 19일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더블헤더 2차전은 1시간 50분 만에 끝났다. 스코어가 1-0이라 경기가 빠르게 진행되긴 했지만, 피치 클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MLB 사무국은 프로풋볼(NFL)이나 프로농구(NBA) 같은 다른 북미 스포츠와 달리 MLB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젊은 팬들의 유입이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해왔다. 그 원인이 너무 긴 시간과 지루한 진행 탓이라고 판단해 수 년간 여러 규정을 파격적으로 손질해가면서 경기 시간과 전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숱한 시도에도 가시적인 효과는 크게 보지 못했다. 오히려 비디오판독 시스템 도입 후 경기 시간이 더 늘어나는 추세였다. 올해 처음 도입한 피치 클락은 이 같은 사무국의 노력에 가장 획기적인 변화로 응답한 장치다.
한국 프로야구도 경기 시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온 건 마찬가지다. 2010년 '12초 룰'을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는 1차 위반시 경고, 2차 위반시 볼로 판정했지만, 올해부터는 한 번만 위반해도 볼이 하나 늘어나도록 규정을 강화했다. 다만 주자가 없을 때만 해당되고, 주자가 있을 때는 따로 시간 제한을 두지 않아 실효성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MLB가 새로운 본보기를 제시하면서 KBO리그도 피치 클락의 효과를 예의 주시했고, 반 시즌 만에 빠르게 도입 결정을 내렸다.
#시범경기부터 화제 만발
역사적인 피치 클락 첫 위반 사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베테랑 내야수 매니 마차도가 남겼다. 마차도는 올해 MLB 시범경기 첫날인 2월 25일(한국시간) 시애틀 매리너스전에 2번 타자 3루수로 선발 출전했다가 1회 첫 타석에서 투수의 공을 미처 보기도 전에 원스트라이크를 기록했다. 30초 안에 타석에 들어서긴 했지만, 타격 준비를 7초 안에 끝내지 못해서다. 마차도는 타격 전 배트를 홈플레이트에 툭 내려치고 돌리는 특유의 준비 동작을 해왔는데, 이날도 같은 행동을 하는 사이 타석 뒤에 있는 피치 클락이 8초에서 7초로 줄었다. 주심은 즉각 자동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다. 마차도는 불리한 볼카운트로 출발하고도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냈다.
마차도는 경기 후 "최소한 내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은 한 것 아닌가. 원스트라이크로 시작해도 안타를 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사실 심판이 '2초 남았어'라고 경고하길래 서둘렀지만, 이미 늦었다"고 아쉬워했다. 또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다. 투수와 타자 모두 빨리 새 규정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며 "피치 클락이 여러 흥미로운 장면을 만들 것 같다. 승패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마차도의 예상은 바로 다음 날 현실이 됐다. 2월 26일 열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범경기는 피치 클락이 경기 시간 단축뿐 아니라 승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두 팀이 6-6으로 맞선 9회 말 2사 만루 풀카운트. 타석에 선 애틀랜타 내야수 칼 콘리는 공 하나에 승부가 갈릴 상황이 되자 긴장을 풀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이때 주심이 갑자기 경기를 중단시켰다. 콘리는 투수의 피치 클락 위반으로 볼넷이 됐다고 생각해 웃으며 1루로 걸어가려 했다. 밀어내기 볼넷으로 애틀랜타가 승리하는 상황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심은 타자 콘리의 피치 클락 위반을 선언했다. 스트라이크가 하나 올라가면서 그대로 삼진이 됐고, 경기는 6-6 무승부로 허무하게 종료됐다. 애틀랜타 선수들은 잠시 심판에게 항의하다 어쩔 수 없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브라이언 스닛커 애틀랜타 감독은 "피치 클락을 이러려고 도입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꼬집었다. AP통신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피치 클락 시대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 가장 극적인 시나리오로 찾아왔고, 경기장의 팬들은 야유했다"며 "모두 2023년에 오신 걸 환영한다"고 썼다.
피치 클락 덕에 '초스피드 삼진'을 잡아내는 진풍경도 나왔다. 뉴욕 양키스 투수 완디 페랄타는 3월 3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시범경기에서 1이닝을 삼진 3개로 처리하며 쾌조의 컨디션을 뽐냈다. 특히 2사 후 투쿠피타 마르카노에게 뽑아낸 마지막 삼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나왔다. 마르카노가 초구 타격 준비 자세를 시작한 시점부터 페랄타가 공 3개를 던져 루킹 삼진을 잡아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18초에 불과했다. 페랄타는 심판이 피치 클락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포수에게 공을 받자마자 곧바로 투구를 했고, 로진백을 만지거나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드는 동작도 하지 않았다. 페랄타에게 타이밍의 주도권을 빼앗긴 마르카노는 타석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MLB닷컴은 "페랄타가 새 규칙인 피치 클락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보여줬다"며 "안 그래도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데 고수였던 그가 초고속으로 삼진을 챙겼다"고 썼다. 에런 분 양키스 감독도 "피치 클락은 페랄타에게 맞춤형 스타일이다. 그는 더욱 강한 무기를 갖게 됐다"며 흐뭇해했다.
이뿐 아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포수 J.T. 리얼무토는 3월 28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시범경기에서 4회 말 수비를 하다 돌연 퇴장 명령을 받았다. 피치 클락 위반에서 촉발된 심판과 포수의 '기싸움'이 원인이었다. 상황은 이랬다. 랜디 로젠버그 주심은 4회 말 필라델피아 투수 크레이그 킴브럴에게 피치 클락 규정을 위반했다며 볼을 선언했다. 기분이 상한 킴브럴은 주심에게 공을 바꿔 달라고 요구해 새 공을 건네 받았지만, 이내 이 공을 그라운드 밖으로 던져 버린 뒤 다시 다른 공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때 포수 리얼무토가 주심을 등지고 앉은 채 등 뒤로 글러브를 내밀었다. 자신이 투수에게 새 공을 던져줄 테니 이 안에 넣어달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러나 주심이 글러브 안에 공을 넣으려는 순간 리얼무토가 갑자기 손을 뺐고, 공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로젠버그 주심은 리얼무토가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해 곧바로 퇴장 명령을 내렸다. 롭 톰슨 필라델피아 감독이 뛰어나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퇴장 명령은 번복되지 않았다. 리얼무토는 경기 후 "나는 돌아앉아 있어서 심판이 내게 공을 건네는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이 경기 심판 조장이었던 댄 이아소그나 심판은 "주심이 충분히 퇴장을 내릴 만한 상황이었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피치 클락은 시작부터 이렇게 여러 모로 뜨거운 화제와 논란을 낳았지만, 근본적인 목적을 이견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이뤄내 호평을 받았다. 올해 MLB 시범경기 평균 시간이 2시간 35분으로 측정돼 지난해 평균(3시간 1분)보다 26분이나 단축된 것이다. MLB 사무국도 모처럼 눈에 보이는 효과를 실감한 뒤 기분 좋게 정규시즌을 시작했다.
#오타니도 못 피했다
MLB 정규시즌 경기에서 처음으로 피치 클락을 위반한 선수는 시카고 컵스 투수 마커스 스트로먼이다. 스트로먼은 3월 31일 밀워키 브루어스와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새 규정의 첫 희생양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3회 초 무사 2루에서 밀워키의 강타자 크리스천 옐리치를 상대로 1볼-2스트라이크의 유리한 볼카운트를 잡았는데, 4구째 투구를 앞두고 2루 주자 브라이스 투랑을 견제하다 투구 시간을 놓쳐버렸다. 투랑을 쳐다보던 스트로먼이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옐리치 쪽으로 몸을 돌려 투구 자세를 잡았지만, 주심은 피치 클락 위반으로 자동 볼을 선언했다. 볼카운트는 2볼-2스트라이크가 됐고, 흔들린 스트로먼은 볼 2개를 더 던져 끝내 옐리치를 볼넷으로 출루시켰다. 그러나 스트로먼은 이어진 무사 1·2루에서 실점 없이 후속 타자들을 막아내면서 금세 안정을 찾았다. 이어 6회까지 3피안타 3볼넷 8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해 피치 클락으로 인한 논란의 여지를 잠재웠다.
얼마 뒤엔 피치 클락 판정에 항의하다 처음으로 퇴장당한 선수도 나왔다.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시범경기 1호 피치 클락 위반 선수'로 기록된 마차도였다. 그는 타격 전 준비 동작이 유난히 많은 타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정규시즌 개막 후에도 결국 피치 클락의 덫을 피해가지 못했다. 4월 5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 3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한 마차도는 첫 타석이던 1회 말 2사 후 풀카운트가 되자 주심에게 오른손으로 '타임 아웃' 사인을 보냈다. 이어 배트를 옆구리에 낀 채 한동안 타격 장갑을 매만지며 손목 부근을 재조정했다. 이 역시 마차도가 숨을 고르기 위한 루틴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순간 주심은 마차도가 피치 클락을 위반했다며 자동 스트라이크를 선언한 뒤 삼진 아웃을 외쳤다. 마차도는 황당한 표정으로 주심과 언쟁을 벌이다 격한 말을 내뱉었고, 주심은 곧바로 퇴장 명령을 내렸다. 마차도는 경기 후 "피치 클락이 8초가 남았을 때 분명히 주심에게 타임아웃을 요청했다. 아쉬운 판단이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투타를 겸업하는 '야구천재'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는 4월 6일 시애틀과 원정 경기에서 투수와 타자로 잇달아 피치 클락을 위반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MLB 최초이자 당분간 오타니만 남길 수 있는 기록이다. 이날 선발 투수로 등판한 오타니는 1회 말 볼넷 두 개를 연속으로 허용한 뒤 적시타를 맞아 1실점 했다. 이어 1사 2루 위기가 계속됐는데, 다음 타자 칼 롤리 타석에서 초구를 던지기 전 피치 클락 위반 판정을 받았다. 다만 오타니는 다른 투수들과 달리 '너무 늦게'가 아니라 '너무 빨리' 던진 게 문제였다. 오타니가 세트 포지션에서 바로 투구 동작을 시작하자 주심이 "상대 타자가 타격 준비를 마치기 전 공을 던지려 했다"며 문제를 삼은 것이다. 당황한 오타니는 2구째 다시 볼을 던져 2볼의 불리한 카운트에 놓였지만, 롤리와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깔끔하게 이닝을 마쳤다. 이후 오타니가 주심에게 다가가 피치 클락 적용 기준과 시점을 문의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오타니는 또 6회 초 타석에서 피치 클락 종료 8초 전까지 타격 준비를 마치지 못해 스트라이크 1개를 손해 봤다. 그러나 풀카운트까지 승부를 끌고 간 뒤 볼넷을 골라 출루하는 데 성공했다. 투타에서 볼카운트를 하나씩 손해 보고도 좋은 성적으로 경기를 마친 점도 오타니다웠다. 투수로서는 6이닝 동안 공 111개를 던지면서 1실점으로 막아 시즌 첫 승을 올렸고, 타자로서 2타수 1안타 1타점 2볼넷을 기록하면서 제 몫을 했다. 오타니는 경기 후 "세트 포지션에서 글러브에 손을 넣은 순간부터 피치 클락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내 판단 착오였다"며 "게임을 마친 뒤 심판실을 찾아가 얘기를 나누면서 (피치 클락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했다. 내가 해야 할 것과 고쳐야 할 것을 이해했기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배영은 중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