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1484억 원 잭팟…SF 오타니 영입 실패에 선수 몸값 폭등 등 운·시장 상황 맞아 떨어져
이정후의 이 계약은 그동안 KBO리그를 거쳐 미국 무대에 진출한 선수 중 최대 규모다. 고교 졸업 후 곧장 미국으로 향한 추신수가 2013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맺은 7년 1억 3000만 달러(1706억 원)의 FA 계약에 이은 두 번째로 큰 총액이다.
KBO리그를 평정한 이정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걸까. 그 스토리를 살펴본다.
#이젠 이정후의 이름으로
2022년 11월 17일 KBO 시상식에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한 선수는 키움 히어로즈의 이정후였다. 당시 기자단 107표 중 104표(97.2%)로 엄청난 지지를 받고 MVP에 올랐다. 시상식에서 이정후는 다소 이례적인 수상 소감을 들려줬다. “지금껏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왔는데 이제 내 야구 인생은 내 이름으로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상 소감은 이정후가 오랫동안 준비한 진심이었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이정후의 이름 앞에는 ‘이종범 아들’이란 수식어가 뒤따랐다. 프로 입단 후에도 그 수식어는 변함이 없었다. ‘이종범 아들’이란 꼬리표가 싫은 게 아니라 ‘이정후’라는 이름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MVP 수상 직후 스스로 아버지의 이름을 떼어냈다. 앞으로 이정후의 이름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2023년 12월 13일 MLB 진출을 위해 포스팅 공시가 된 이정후의 거취가 알려졌다. ‘뉴욕 포스트’ 존 헤이먼, ‘디애슬레틱’의 켄 로젠탈 등 MLB 소식에 정통한 기자들은 저마다 “이정후가 샌프란시스코와 6년 1억 1300만 달러(약 1484억 원)에 입단 합의를 이뤘다”는 소식을 전했다.
곧 공식 입단 소식도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15일 이정후와 계약을 발표했다. 이정후는 앞서 진행된 메디컬 테스트도 무사히 통과했다. 지난해 KBO 시상식에서 ‘이종범의 아들’이란 수식어를 떼어낸 아들은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메이저리그에 알리며 공식 입단식을 앞두고 있다.
#메이저리그를 꿈꾼 결정적인 계기
원래 이정후의 꿈은 메이저리그가 아니었다. 아버지 이종범 전 LG 코치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했을 때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난 이정후는 일본 야구를 보고 자랐고, 스즈키 이치로를 롤모델로 삼았다. 프로 입단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일본 프로야구 진출이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건 2021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미국 대표팀과 경기였다. 이정후는 그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나선 닉 마르티네스와 조 라이언 등을 상대로 멀티히트와 2루타를 기록했는데 이 상황이 그의 마인드를 변화시킨 계기로 작용했다. 다음은 이전 이정후와 인터뷰를 했을 때 직접 들은 내용이다.
“미국전에서 닉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2안타를 치고, 특급 신인으로 꼽히는 조 라이언한테 2루타를 치는 등 미국 투수들한테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메이저리그에는 그들보다 더 강한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많다는데 그들을 상대로 내가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들을 매일 상대해보고 싶었다. 이후 일본이 아닌 메이저리그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2023년 1월 2일 이정후는 소속팀 키움 구단으로부터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후 이정후는 지난 1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스캇 보라스를 만나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 그 자리에는 아버지 이종범 전 코치, 어머니 정연희 씨도 함께 했다. 이정후가 스캇 보라스의 손을 잡은 건 그가 얼마나 메이저리그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이 대단한지 알 수 있게 한다.
#‘보라스의 매직’을 실감하다
2023시즌을 마치고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 진출 계획을 밝힌 이정후는 비시즌 동안 타격폼 수정을 거듭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강속구에 대응하기 위한 변화였지만 시즌 초반 최악의 부진을 보이는 바람에 이전의 타격폼으로 돌아갔고, 성적도 회복됐다. 그러다 7월 발목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이 됐고, 수술과 재활을 거친 끝에 10월 10일 키움의 홈 시즌 최종전에서 한 타석을 소화하는 걸로 키움 팬들에게 고별 인사를 대신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가장 중요한 시즌에 부상과 수술을 경험한 이정후. 그는 포스팅을 통해 MLB행을 공식화하면서 지인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김)하성 형보다 더 받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말이다. 김하성이 3년 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맺은 계약은 4년 2800만 달러였다. 이정후는 자신의 부상과 수술 이력, 그리고 수술 후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한 점들이 감점 요인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대리인은 ‘슈퍼 에이전트’로 불리는 스캇 보라스였다. 미국 현지 매체들이 이정후의 예상 몸값으로 5000만 달러에서 7000만 달러를 부를 때 스캇 보라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상 이전의 이정후 성적과 인성, 평판, 평가는 거의 완벽했기 때문이다.
스캇 보라스는 지난 11월 MLB 단장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현장을 찾은 취재진 앞에서 자신의 고객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지 역설했다. 당시 보라스는 자신감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정후를 홍보했다. “수비력과 파워를 겸비한 이정후에 대해 이미 메이저리그의 절반 가까운 팀들이 영입을 문의했다”고 밝히면서 “이정후가 향후 메이저리그에 K팝을 가져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마침내 스캇 보라스는 자신의 말을 결과로 증명하면서 이정후에게 초대형 계약을 안겼다.
이정후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해 정식으로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는다면 이정후의 원 소속팀인 키움 히어로즈는 포스팅 이적료로만 1888만 5000달러(약 250억 원)을 받는다. 이적료는 이정후의 계약 연봉과 별도로 샌프란시스코 구단이 키움에 지급하는 형태다. 즉 샌프란시스코는 이정후를 영입하기 위해 1억 1300만 달러에다 1888만 5000달러의 돈을 쏟아내야 한다.
이정후의 이번 계약은 지난해 요시다 마사타카가 보스턴 레드삭스와 5년 9000만 달러 계약으로 MLB에 진출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다. 요시다의 에이전트도 스캇 보라스였다. MLB에 부는 ‘보라스 매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계약들이다.
#샌프란시스는 왜 이정후에게 거액을 안겼나
지난 2월 미국 애리조나 키움 히어로즈 스프링캠프에 미국인 스카우트가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찾는 이는 이정후였다. 그 스카우트는 오랫동안 이정후의 훈련 모습을 관찰하고 메모하면서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이정후를 찾는 스카우트들이 많았다. 시즌 개막 후에는 고척스카이돔에 모습을 드러낸 MLB 스카우트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정후가 홈 최종전을 치를 때 고척돔 관중석에서 이정후가 타석에 들어서자 기립 박수를 보낸 샌프란시스코 피트 푸틸라 단장이었다. 미디어에서 푸틸라 단장을 주목한 건 그동안 20여 개 넘는 MLB 팀들이 이정후를 관찰하기 위해 고척돔을 찾았지만 메이저리그 단장이 직접 한국을 방문한 건 샌프란시스코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관심은 계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그동안 FA 시장에서 ‘물’을 먹었다. 대형 선수들과 계약을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가 번번이 실패했다. 올 시즌에는 FA 시장의 ‘최대어’인 오타니 쇼헤이한테 집중했다. 그러나 오타니는 LA 다저스와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오타니를 놓친 샌프란시스코는 외야수 보강을 위해 오래 전부터 공을 들인 이정후한테 초점을 맞췄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스캇 보라스가 샌프란시스코를 공략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은 “샌프란시스코가 오타니를 놓친 게 이정후한테 큰 혜택을 안겼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번 FA 시장에 거물급 외야수인 코디 벨린저가 매물로 나왔지만 과거 다저스에서 2년여 동안 부상과 부진으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던 게 벨린저의 가치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올해 시카고 컵스에서 재기에 성공하긴 했지만 샌프란시스코는 코디 벨린저에게 5년 이상의 장기 계약과 2억 달러 이상의 몸값을 안기느니 벨린저보다 젊고 건강한 이정후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후가 그런 거액을 받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한 건 엄청난 운과 시장 상황, 선수의 몸값 폭등 등 다양한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송재우 위원은 김하성을 경험한 샌디에이고 전 감독이자 현재 샌프란시스코 신임 감독인 밥 멜빈과 이정후의 궁합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나타냈다.
“밥 멜빈 감독은 베테랑 지도자로 ‘덕장’으로 꼽힌다. 내성적이고 차분한 이미지의 그가 샌디에이고에서 김하성을 주전으로 성장시켰고, 김하성이 올라서길 기다려줬다. 이러한 감독의 성향이 이정후한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송재우 위원은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인 오라클파크가 좌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이라고 설명했다. 홈런 타구가 잘 나오지 않는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지만 대신 우중간 외야가 넓어 3루타가 많이 나오는 특징이 있다. 정교한 콘택트와 준수한 장타력을 겸비하고 발이 빠른 이정후한테 오라클파크는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최적의 야구장인 셈이다.
12월 15일(한국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은 이정후는 곧 입단식을 갖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들에게 인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