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납치 살인’ 배후 낮은 형량에 유가족 탄식…정유정·조선·최원종 등 ‘이상동기 범죄’ 기승
2023년 신상정보가 공개된 피의자는 역대 두 번째로 많다.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 대상은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정강력범죄법) 제8조의 2에 따른 특정강력범죄 피의자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25조에 따른 성폭력범죄 피의자들이다.
연도별로 보면 △2010년 2명 △2012년 1명 △2014년 1명 △2015년 2명 △2016년 4명 △2017년 1명 △2018년 3명으로 이어지다 △2019년 5명 △2020년 9명 △2021년 10명 △2022년 5명을 기록했다.
2020년과 2021년에 9명과 10명을 기록한 데에는 당시 성폭력처벌법 제25조에 따라 신상정보가 공개된 피의자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성폭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는 역대 신상정보 공개를 통틀어봐도 2020년 7명, 2021년 2명 등 9명이 전부다. 모두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성착취 관련 사건이었다. 반면 2023년에는 특정강력범죄 피의자만 9명으로 역대 최다다. 그만큼 2023년은 특정강력범죄가 많았던 한 해였다.
#‘강남 납치·살인사건’ 이경우 황대한 연지호 황은희 유상원
신상공개 제도 시행 이후 가장 많은 피의자 신상정보공개가 이뤄진 사건은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으로 ‘갓갓’ 문형욱, ‘박사’ 조주빈 등 6명의 피의자 신상정보가 공개됐다. 2023년 벌어진 ‘강남 납치·강도살인 사건’으로 신상정보가 공개된 피의자 5명으로 역대 두 번째, 특정강력범죄 피의자로는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3월 29일 밤 11시 46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의 한 아파트 앞에서 40대 여성 A 씨가 남성 2명에게 납치됐다. 자정 무렵이라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대치동 학원가와 밀접한 700가구 규모 아파트 단지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를 목격한 시민의 신고로 바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A 씨를 납치한 차량은 3월 30일 0시 12분 서울톨게이트를 통과해 대전 방향으로 향했다. 0시 52분 즈음 경찰은 범행 차량을 특정했다. 납치범들은 새벽 6시쯤 대청호 인근에서 시신을 암매장했고 7시 30분 범행 차량을 버리고 렌터카를 이용해 충북 청주로 이동, 렌터카를 버리고 각각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경찰은 오전 8시 범행 차량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고무망치와 주사기, 혈흔 등이 발견됐다.
경찰은 31일 오전 10시 45분에 성남 모란역에서 납치범 연지호(29)를 체포했고 오후 1시 15분 성남 수정구 한 모텔에서 납치범 황대한(35)도 체포했다. 황대한과 연지호는 배달대행 일을 하며 알게 된 사이다.
경찰은 연지호와 황대한을 조사해 A 씨를 1시간 40분 동안 감금한 뒤 살해하고 시신을 대전 대청댐 인근에 파묻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31일 오후 5시 35분 피해자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 5시 40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공범 이경우(35)를 체포했다. 대북 작전 등을 담당하는 특수부대 출신인 이경우는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근무 중인 인물로 황대한과 대학 동창 사이다.
4월 5일 오후 경찰은 경기도 내 한 백화점에 있던 유상원(51)을 체포하고 황은희(49) 역시 경찰이 조사를 위해 임의동행했다. 사실혼 관계인 유상원과 황은희는 강하게 혐의를 부인했지만 결국 강도살인교사 혐의로 4월 5일과 8일 각각 구속됐다.
경찰은 유상원과 황은희는 2022년 9월 이경우에게 착수금 2000만 원 등 범행 준비자금 명목으로 7000만 원을 지급한 사실을 확인했고 사건 발생 직후인 3월 30일 유상원이 이경우가 두 차례 만나 A 씨의 가상화폐 계좌를 열어본 정황을 확보했다. 이에 경찰은 유상원과 황은희를 공동정범으로 판단해 강도살인교사에서 강도살인으로 혐의를 변경해 검찰에 송치했다.
살인 동기는 암호화폐(가상화폐) 투자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이다. 피해자와 유상원 황은희 부부가 퓨리에버코인 폭락 후 겪은 갈등이 납치·살해로 이어진 것이다.
이미 1심 판결이 끝났다. 10월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김승정 부장판사)는 이경우와 황대한에게 무기징역, 연지호(30)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또한 유상원과 황은희는 각각 징역 8년과 징역 6년을 선고 받았다.
검찰이 주범 이경우, 황대한과 범행의 배후로 지목된 유상원, 황은희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연지호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한 것에 비하면 형량이 크게 낮아졌다. 특히 사형이 구형된 유상원, 황은희에게 각각 징역 8년과 징역 6년이 나오자 방청석에 있던 유족과 지인들 사이에서 탄식과 울음을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 이유는 강도살인과 강도예비 혐의로 기소된 유상원과 황은희에 대해 재판부가 강도살인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경우 등과 살인을 공모했는지 직접적인 증거가 없고, 모두 간접적인 정황들뿐”이라고 밝혔다. 양측 모두 항소해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또래 살인·사체 유기 사건’ 정유정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인데 굉장히 일반적이지 않은 밝은 모습이다. 범죄자도 누군가를 죽이면 당황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데 저 모습은 그런 공포나 당황스러운 모습이 들어 있지 않다. 단순한 사이코패스하고는 약간 다르다. 굉장히 독특한 장면이다.”
살인 직후 자신의 집으로 가 여행용 캐리어를 챙겨 다시 피해자 집으로 가는 살인자의 CC(폐쇄회로)TV 영상을 본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의 분석이다.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피의자의 태연함이 더욱 눈길을 끈 정유정(23)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정유정이 유치장에 수감된 뒤 경찰 관계자도 “대개 강력 범죄자들도 피의자 신분으로 유치장에 수감되면 매우 불안한 태도와 행동을 보이지만 정유정은 하루 세 번 식사를 다 챙겨 먹었고 잠도 잘 자며 지내는 등 매우 태연한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을 정도다.
정유정의 범행은 과외 앱(애플리케이션)에 학부모로 가입한 뒤 혼자 사는 과외 선생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피해자 B 씨와 과외 앱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정유정은 “시범 과외를 한번 해보고 결정해달라”며 주소를 요구했다.
5월 26일 오후 4시 정유정은 온라인에서 구입한 중고 교복을 입고 B 씨의 집으로 향했다. 오후 5시 40분께 B 씨 집에 도착한 정유정은 흉기로 B 씨 가슴을 여러 차례 찔러 살인했다. 범죄 흔적이 남은 옷은 갈아입은 뒤 오후 7시께 B 씨 집에서 나왔다. 오후 7시 40분에는 마트에서 사체를 훼손할 수 있는 흉기와 락스, 비닐봉지 등을 구매했다.
이날 정유정은 B 씨의 집과 자신의 집을 여러 차례 오갔다. 두 집은 택시로 20분 정도 거리. 자신의 집에서 시신을 담을 캐리어를 가져왔고 시신 일부를 자신의 집으로 옮기기도 했다.
5월 27일 0시 30분께 정유정은 피해자 집에서 나와 택시에 탑승했다. 택시를 타고 경상남도 양산시 호포역 북쪽 인근에 하차한 정유정은 여행용 가방에 담겨 있던 시신 일부를 황산문화체육공원 인근 낙동강변에 유기했다.
혈흔이 묻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풀숲으로 들어가는 정유정을 수상하게 여긴 택시 기사는 오전 1시 30분께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오전 6시께 정유정을 긴급체포했다. 풀숲에서 피해자 시신 일부를 발견한 경찰은 피해자 집에서 나머지 시신 일부도 발견했다.
검거된 정유정은 우발적 범행을 주장했지만 경찰은 그가 ‘살인’ ‘시신 없는 살인’ ‘살인 사건’ 등을 검색하는 등 2월부터 범행을 계획했음을 확인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5년 동안 별다른 직업 없이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정유정은 사실상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왔다.
11월 24일 오전에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부산지법 형사6부(부장 김태업)는 정유정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정유정이 흐느꼈지만 재판부는 “무기한 수감 생활을 통해 진심으로 피해자와 유족에게 속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 과정에서 정유정 측 변호인은 ‘상세 불명의 충동 장애, 우울 에피소드 등 정신질환에 따른 심신 미약’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범행 준비부터 실행까지 정유정이 주도면밀하고 치밀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양육 및 경제적 상황, 진학·취업 좌절 등으로 불우한 환경은 일부 인정하면서도 “불우한 환경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번화가 칼부림 사건’ 조선 최원종
7월 21일 오후 2시 7분께 신림역 4번 출구 번화가에서 3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20대 남성 1명을 숨지게 하고, 30대 남성 3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바로 조선(33). ‘신림동 칼부림 사건’이다.
택시를 타고 신림역 4번 출구 근처에서 내린 조선은 90m 떨어진 상가 초입에 있던 첫 번째 피해자를 갑자기 공격했다. 피해자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10여 차례 자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뒤 쓰러진 피해자를 한 번 더 찌른 조선은 번화가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조선은 30대 남성 3명에게도 흉기를 휘두른 뒤 흉기를 들고 주변을 배회하다가 인근 계단에 앉았다. 그리곤 별다른 저항 없이 오후 2시 20분께 경찰에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됐다.
체포 직후 경찰 조사를 받은 조선은 “내가 불행하게 사니까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고, 분노에 가득 차 범행을 한 것”이라며 “할머니로부터 ‘왜 그렇게 사느냐’고 꾸짖음을 들어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10여 일 뒤인 8월 3일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최원종의 ‘서현역 칼부림 사건’이다. 최원종은 8월 3일 오후 5시 56분쯤 모닝 차량을 몰고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AK플라자 분당점) 앞 버스정류장으로 돌진해 행인을 덮쳤다. 이후 쇼핑몰로 들어간 최원종은 건물 1층과 2층을 오가며 무차별 흉기를 휘둘렀다. 차량 돌진으로 60대 여성이 숨지고 5명이 다쳤다. 이후 당시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20대 여성도 사망했다. 쇼핑몰에서 최원종이 휘두른 흉기로도 9명이 다쳤다.
학원 관계자와 아파트 주민, 경비원들은 대부분 최원종에게 별다른 범죄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반면 온라인에서 최원종은 흉기를 든 사진을 올리고 범행을 암시하는 게재하는 등 반사회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조선과 최원종 칼부림 사건은 모두 일상공간에서 벌어진 참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번화가에서 칼부림을 하겠다는 예고글이 수없이 올라와 일상의 공포를 더하기도 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칼부림 사건은 없었고 예고글을 올린 이들은 대부분 경찰 수사를 통해 검거돼 처벌받았다.
#‘신림동 공원 강간 살인 사건’ 최윤종
신림동 칼부림 사건이 벌어지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8월 17일 신림동의 한 공원에서 또 강력 범죄가 벌어졌다. 최윤종의 강간살인 사건이다.
8월 17일 오전 9시 55분께 자택을 나선 최윤종은 서울 관악산 인근 공원 주변을 1시간 동안 배회하며 범행 대상을 찾았다. 평소 이 공원을 자주 다닌 최윤종은 그곳에 CCTV가 없다는 걸 알고 범행 장소로 정했다.
피해자는 서울 관악구 소재 한 초등학교의 교사로 방학 중 교직원 연수 등 업무를 보기 위해 해당 공원을 통해 출근하다 변을 당했다. 최윤종은 너클을 양손에 착용한 채 피해자를 주먹으로 때린 뒤 성폭행했다. 너클은 2023년 4월 최윤종이 강간을 목적으로 인터넷에서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최윤종의 포털사이트 검색기록을 분석한 결과 8월 들어 성폭행, 살인, 살인예고 글 관련 기사를 열람한 이력이 확인됐다.
최윤종은 무직 상태로 서울 금천구 독산동 자택에서 부모와 함께 거주했다. 외부 교류 없이 집과 PC방, 도서관, 공원 등을 오가며 사실상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윤종의 통화 기록에는 음식 배달 외 친구나 지인으로 추정되는 이들과의 교류 흔적은 없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