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국정원 대선개입·통진당 행정소송 모두 불인정…‘하세월 재판’에 공판 갱신절차가 결정적 역할 지적
#핵심 혐의 포함 47개 혐의 모두 인정 안 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 임정택 민소영 부장판사)는 1월 26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하급자들의 직권남용죄 등 혐의가 대부분 인정되지 않고, 일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지시·가담 등 공범 관계가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핵심 쟁점이었던 3가지 직권남용에 대해서도 모두 무죄가 나왔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등 각종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 사법행정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법관을 ‘물의야기’로 분류해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했다는 의혹, 파견 법관을 통해 헌법재판소 내부 정보를 캐내려고 직권을 남용했다는 의혹 등에 대해서도 “혐의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사법농단 관련 혐의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14명 가운데 유죄가 인정된 이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두 명 뿐이다.
1심까지 무려 1810일이 걸린 이번 사건은 2017년 2월부터 시작됐다. 당시 판사였던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발령받은 뒤 양 전 대법원장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견제하라는 지시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2017년 9월 취임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그해 11월부터 2018년 5월까지 2차·3차 조사를 벌였고 2018년 6월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수사 한 달 만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2018년 10월 27일에는 임 전 차장을 구속했다. 2019년 1월 24일 양 전 대법원장이 전직 사법부 수장 최초로 구속돼 2019년 2월 재판에 넘겨졌다.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장으로 재직한 6년 동안 역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을 도모할 목적으로 당시 박근혜 정부와 일종의 '재판거래'를 통해 일선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당시 사법행정을 비판한 법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등 총 47개 혐의가 있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었다.
법원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인정 여부를 두고 고심했다. 한 판사가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를 기준으로 유무죄를 판단했다. 앞선 법원은 법원행정처 법관 및 수석부장판사에게는 “일선 재판부의 판단에 개입할 권한이 없어 권리행사를 방해받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고위급 법관이었던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등의 혐의를 두고는 5년 동안 공전했다.
#도돌이표 ‘공판 갱신절차’ 의도적 전략인가
하염없이 길어지는 재판을 두고 일각에서는 의도적 재판 지연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하세월 재판에는 공판 갱신절차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통상 법원은 대법원 재판 예규에 따라 재판장의 경우 2년, 일반 판사의 경우 1년을 주기로 인사이동을 한다. 이때 새 재판부는 앞선 재판부가 맡던 재판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이를 ‘공판 갱신절차’라고 한다. 통상 문서 형태로 전달받는 간이 형식으로 갱신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피고인과 변호인이 동의한다면 이 절차를 생략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원칙대로’를 고수했다. 2021년 2월 24일 법관 정기 인사에 따라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부가 변경되자 형사소송법 및 규칙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개월 뒤 다시 재판을 연 새로운 재판부는 5개월에 걸쳐 증인 11명의 증거 조사 녹취파일을 하나하나 재생하는 방식으로 공판절차를 갱신했다. 이 과정에서 총 7개월이 소요됐다.
이를 두고 검찰은 고위 법관 출신 피고인의 의도적인 ‘재판 지연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호승진 부부장 검사는 2023년 6월 7일 열린 266차 공판에서 “재판 시작될 때만 해도 ‘세기의 재판’이 될 거란 평가가 있었고, 실체진실·소송경제·적법절차 원칙이 조화롭게 조율돼 법학도에게도 본보기가 될 재판을 기대했는데 재판 과정에서 소송 지연을 초래하는 피고인들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있다”고 했다.
반면 피고인 측은 재판 장기화의 원인이 검찰의 무리한 기소에 있다고 주장했다. 원칙적 공판 갱신 절차는 형사소송법이 추구하는 직접주의 원칙을 덜 훼손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검찰이 작은 의혹까지 모두 잡아 공소장에 넣다 보니 기록이 불필요하게 방대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80여 명의 검사가 작성한 공소장은 296쪽에 달했다.
증인 신문 과정도 험난했다. 재판에 나와야 하는 증인이 점점 늘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이 작성한 조서 및 증거에 동의하지 않아 재판부가 직접 이들을 불러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신청된 증인의 수는 총 211명이다. 뿐만 아니라 증거 목록이 워낙 방대해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공판준비기일이 다시 열리기도 했다.
#확정 판결까지 수년 걸릴 수도
277번의 공판 끝에 1심이 끝났지만 최종 판단까지는 갈 길이 멀다. 1심 판결 이후 항소심과 상고심이 남아있고 법리가 워낙 복잡한 탓에 확정 판결까지 수년이 걸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앞서의 형사 전문 변호사는 “항소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2심에서도 법리 다툼이 계속된다면 대법원 판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며 “원칙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재판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은 소송경제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조계에선 공판 갱신절차에 대한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법원행정처는 오는 2월 법관 정기인사를 앞두고 방지책을 발표했다. 먼저 법관 임기를 ‘재판장 2년, 배석 1년’에서 ‘재판장 3년, 배석 2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재판부 교체 주기를 늘려 업무의 연속성을 높이고 공판 갱신절차 등으로 재판이 지연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1월 19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법관 등의 사무분담 및 사건배당에 관한 예규’ 개정안을 행정예고하고 2월 예정된 법관 정기인사부터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내놨다. 서울중앙지검은 1심 선고 직후 입장문을 내고 “1심 판결의 사실 인정과 법리 판단을 면밀하게 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