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의 주된 목적 ‘승계작업’ 아니라는 판단…다른 형사 사건 기준과 같았는지 의문
형사법은 원칙적으로 범죄행위를 하려는 고의가 있을 때만 처벌한다. 실수(과실)는 신체적 피해를 입힌 때처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처벌하지 않는다. 일상에서도 흔한 “일부러 하지 않았다”는 변명은 형사 피고인의 전형적인 항변이다. 반드시 고의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행위의 동기나 목적을 밝히는 것은 범죄 입증에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화이트칼라’ 사건에서는 행위의 동기나 배경, 고의 여부를 중요하게 다투는 경우가 많다. 기업범죄로 기소된 경영진이 사적인 이익이나 부정한 목적이 아니라, 사업상 합리적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사업을 잘해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거나 실수가 있었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이 사건처럼 총수일가의 지배권 승계를 위한 부정한 합병 거래 의혹이 문제된 사건에서는 특정인만이 아니라 전체 주주나 회사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재용 회장 역시 이 같은 취지로 주장했다. 합병은 합리적인 사업상 목적이 있었고, 설령 승계 목적이 고려됐다고 하더라도 지배력 강화는 회사와 주주들에게도 이익이므로 합병 목적이 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1심 판결은 이러한 주장을 전부 인정했다.
물론, 이 사건에서 가장 핵심 쟁점을 꼽으라면 합병비율이 불공정했는지, 이를 위해 각종 부정한 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다. 따라서 합병 목적만으로 결론이 좌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승계작업’이라는 합병 목적의 부당성 자체가 부정된 상황에서, 각종 부정거래 행위와 고의성이 인정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삼성물산이나 제일모직과 같은 규모의 상장회사가 합병을 추진하면서 사업적 목적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면 주주와 시장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승계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는 판단 자체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합병 목적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 형사 사건에서는 불법적인 목적만이 유일하게 존재해야만 범죄의 동기나 고의가 성립한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법적인 의도나 목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범죄 동기나 고의가 대부분 인정된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주된’ 목적이 승계작업이 아니라는 판단에 대해서는, 사실 다른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지배권 승계’라는 키워드를 빼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비롯한 일련의 지배구조 개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정 안과 밖의 세상이 서로 달랐다는 생각마저 든다.
1심 법정의 기준을 충족하려면 ‘약탈적 합병’, ‘편법적 지배권 승계’ 등이 분명하게 적시된 문건 정도는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칼라 범죄에서 그 정도 명백한 증거를 얻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나아가 일반적인 형사 사건에서 이 정도 수준의 높은 입증이 요구됐는지 의문이다. 무죄라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한 입증이 필요함은 분명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100% 입증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판결문에서는 ‘단정할 수 없다’는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세상만사 중 단정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한편, 안정적인 지배권이나 경영권이 주주가치에 긍정적인지는 이론적으로 논쟁이 있고 현실에서도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경영권이 주주가치에 부합하려면 소유지배구조가 건전해야 한다. 그러나 삼성그룹을 비롯해 국내 대기업집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다른 주주에게도 이익이었다는 주장이 사법적 정의나 경제적 정의에 부합하는지 묻고 싶다. 설령 다른 주주에게 일부 이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구보다 큰 이익을 얻은 것은 이재용 회장이다. 모든 주주가 지분율에 비례해서 공평한 이익을 얻었는지, 다른 주주들은 기회손실을 포함해 경제적 손해를 입지는 않았는지, 상급심에서는 이에 대한 충실한 대답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노종화는 회계사이자 변호사다. 현재(2017년 5월~)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상근)으로도 재직 중이다.
노종화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