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드래프트 지명 후 마이너 생활 중…“아버지는 야구 인생 롤모델”
지난 3월 8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서프라이즈 스타디움에서 열린 텍사스 레인저스와 시범경기에 교체 출전했던 케빈 심은 2타석 1타수 1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선보였다. 3월 20일(한국시간) 애리조나 마이너리그 훈련장에서 케빈 심을 만나 그의 특별한 야구 이야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케빈 심, 심종현입니다.”
2009년 7세 때 두 형제, 부모님과 함께 떠났던 미국 이민. 어린 심종현은 낯선 환경과 언어에 다소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야구가 있었기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은 있어도 방과 후 아버지와 ‘야구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야구가 놀이였고, 취미 생활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야구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코치는 아버지였다. 어느 코치보다 레전드급의 대단한 선수 출신이라 아버지한테 야구의 모든 걸 체계적으로 배웠다. 형, 심종원도 야구를 하고 있었던 터라 두 형제의 야구 인생은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됐고, 펼쳐졌다. 미국에서 태어난 막내 에릭도 현재 야구 선수로 활약 중이다.
그의 아버지 심정수는 KBO리그를 대표한 ‘슬러거’였다. 1994~2008년 OB(현 두산), 현대, 삼성을 거쳐 15시즌 통산 1450경기서 타율 0.287, 328홈런 1029타점을 올렸다. 파워로 대변된 심정수의 별명은 ‘헤라클레스’였다.
케빈 심은 샌디에이고 소재 토리파인스 고교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부터 재능을 뽐낸 그는 4년 연속 올 아메리카 아카데믹 팀에 선정됐다. 샌디에이고 대학 2학년 시즌 때 57경기서 타율 0.297 12홈런 57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남긴 케빈 심은 대학 3학년 때 38경기서 타율 0.298(141타수 42안타) 13홈런 40타점 OPS(출루율+장타율) 1.025를 기록했다.
케빈 심은 2023년 7월 11일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5라운드 전체 148순위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지명을 받았고, 148번 슬롯 계약금은 42만 1100달러다. 케빈 심은 드래프트 지명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드래프트에 지명되길 바랐지만 높은 순위를 기대하기보단 메이저리그 시스템 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드래프트 당일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거실에서 방송을 지켜봤다. 처음엔 나한테 관심을 나타냈던 팀들이 나를 패스하고 다른 선수를 지명했을 때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지명받기 전에 내 에이전트가 전화를 해선 두 라운드 정도 후에 내 이름이 불릴 거라고 귀띔해주더라. 이후 방송이 진행됐고, 애리조나가 5라운드에 내 이름을 불렀다.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다. 가족 모두 일어나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눈물을 흘리셨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후 정착하며 생긴 목표가 실현됐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 그 선물을 안겨드렸다는 사실이 내겐 큰 축복이었다.”
케빈 심은 미국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매우 낯선 환경이란 걸 느꼈고, 친구도 없었고,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던 장면들이다. 수업을 마치면 부모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는데 그 시간이 5분이나 10분만 지체돼도 겁이 나서 울곤 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야구를 시작하면서 야구를 통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케빈 심은 ‘야구선수 심정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너무 어린 나이라 선수 시절의 심정수를 떠올리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활약상을 유튜브를 통해 접한 후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내 야구 인생의 엄청난 롤모델이다. 우리는 항상 야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비시즌마다 아버지는 내게 배팅볼을 던져주고 수비 훈련을 위해 펑고를 치신다. 지금 내가 갖고 있고, 누리는 모든 것들은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셨다. 아버지한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심정수’ 하면 ‘삶은 달걀’이 떠오른다. 현역 시절 하루에 삶은 달걀흰자만 수십 개를 먹었던 일화가 유명했던 터라 자연스레 달걀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지가 내게도 달걀을 많이 먹으라고 강조하셨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항상 계란을 삶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삶은 달걀 대신 달걀 프라이를 해서 먹곤 했다. 지금은 구단 트레이닝 센터에서 단백질 관련 많은 영양제를 제공해줘서 달걀을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
심정수와 케빈 심은 어떤 점이 닮았을까.
“아버지의 선수 시절 영상을 보면 나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유격수로 프로 지명된 후 15년 동안 외야에서 뛰었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외야수로만 활약했고, 나는 내야 전 포지션을 두루 소화하고 있는 점은 차이가 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선수 시절 나보다 더 다리가 빨랐다고 하는데 그건 직접 확인해보지 않아 확실치 않다.”
2023년 7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을 맺은 케빈 심의 시작은 루키리그였다. 그는 루키리그 4경기에서 타율 0.533 7타점 OPS(출루율+장타율) 1.100으로 맹활약했다. 이후 애리조나는 그를 로우 싱글A로 승격시켰다. 지난 시즌 케빈 심은 루키리그와 싱글A에서 33경기 타율 0.288(125타수 36안타) 3홈런 21타점 2도루 10볼넷 33삼진을 기록했다.
“루키리그 첫 경기에선 5이닝을, 두 번째 경기에선 7이닝을, 그리고 다음 두 경기에서 9이닝을 뛰고 싱글A로 올라갔다. 루키리그에서 경험이 굉장히 좋은 출발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내가 있는 리그에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형태의 선수들이 존재한다. 그중 일부는 영어를 못해 언어 장벽이 있지만 야구 용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그게 야구의 가장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케빈 심은 싱글A에서 기록한 삼진 33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런 숫자들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야구 하다 보면 항상 그런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야구의 방식이고,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지금 스프링캠프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들이 시즌이 시작됐을 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내 삶과 타석에서의 내가 꽤 좋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번 시즌이 더 기대된다.”
케빈 심은 스프링캠프 동안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원정 시범경기에 출전했던 텍사스 레인저스전(3월 8일)을 떠올렸다. 보통 원정 시범경기는 빅리그 주전 선수들이 휴식 차원에서 많이 빠지는 편이다. 그 공백을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채우는데 싱글A에서 뛰었던 케빈 심에게 기회가 온 것.
“스프링캠프 동안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열리는 빅리그 경기에 뛸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다. 관중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고, 더그아웃에는 5년 10년 15년 이상 된 빅리그 선수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들과 함께 야구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듣는 건 아주 멋진 일이었다. 운 좋게 텍사스전에 두 차례 타석에 들어설 수 있었다. 3루에 주자가 있어 희생플라이로 1타점을 올렸고, 다음 타석에서도 2루타를 쳤다. 타석에 들어선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냥 공 보고 치자고만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경험을 더 쌓아야 타석에서 조금 편해질 것 같다.”
올 시즌 케빈 심은 어느 리그에서 시작할까. 그는 로우 싱글A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 하이 싱글A 팀이 있는 오리건 주의 힐스보로 홉스에서 뛸 것 같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스’ 심정수의 아들 케빈 심이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면 아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로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케빈 심은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이후 빅리그 데뷔전을 통해 아버지에게 더 큰 선물을 안겨주고 싶어 한다.
미국 애리조나=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