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메이저리그 데뷔전서 썼던 글러브 끼고 시구…다르빗슈 한국인 팬이 운영하는 카페 찾아 화제
1994년 4월 9일, 한국인 선수 최초로 메이저리그(MLB) 마운드를 밟았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50)는 MLB 서울시리즈 개막을 앞두고 남다른 감회를 감추지 못했다. 그 후 30년이 흐른 2024년 3월 20일과 21일, 한국의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사상 최초로 MLB 정규시즌 개막 2연전을 열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리즈는 최근 수개월간 한국·미국·일본 야구계를 아우르는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올해 다저스와 10년 7억 달러에 사인한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29)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타석에 섰다. 서울시리즈 입장권은 1층 테이블석이 70만 원에 달하고, 가장 싼 외야 4층 지정석도 12만 원이나 하는 고가였다. 그런데도 두 경기 티켓이 모두 순식간에 매진됐다. 고척돔 외부에 임시로 만든 MLB 공식 머천다이즈 스토어 앞에는 오후 내내 기나긴 '오픈런' 줄이 늘어섰다. 특히 오타니의 등번호가 찍힌 흰색 유니폼과 티셔츠는 순식간에 동나 품귀 현상을 빚었다.
#오타니, "한국은 좋아하는 나라"
오타니는 명실상부한 서울시리즈의 주인공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바로 옆 나라인 일본에서도 수많은 취재진이 찾아와 오타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특히 오타니는 서울시리즈의 첫 공식 일정인 3월 16일 기자회견에서부터 "한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라며 친근감을 드러내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오타니는 하나마키 히가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2012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에 출전한 일본 야구대표팀 멤버로 서울 목동구장을 찾은 경험이 있다. 그는 "고교생이던 2012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며 "한국에서 다시 뛸 수 있어 정말 기쁘다. 야구를 통해 한국에 다시 오게 된 것도 무척 특별하다"고 말했다. 또 다저스 선수단이 입국한 3월 15일 인천국제공항에 수많은 환영 인파가 몰린 데 대해 "한국과 일본은 항상 스포츠에서 라이벌 관계였다. 한국과의 경기를 보면서 한국 선수와 한국 팀을 항상 존경해왔다"며 "그래서 이렇게 환영받는다는 게 더욱 기분 좋은 일"이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뿐만 아니다. 오타니는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기다려지다!"라는 한국어로 기대감을 표현하면서 태극기 이모티콘을 함께 붙였고, 개막전 당일에도 다시 한국어로 "오늘 저녁 시즌이 서울에서 시작됩니다. 곧 만나요. 다저스 파이팅"이라는 글을 직접 올렸다. 3월 20일 열린 개막 1차전에서는 3회 초 안타와 도루로 2루를 밟은 뒤 베이스 옆을 지나치던 샌디에이고 유격수 김하성에게 유독 반가운 눈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어 오타니가 김하성에게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입모양이 중계 화면에 선명하게 포착돼 한국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김하성은 경기 후 "오타니가 우리말로 먼저 인사하기에 나도 ''안녕하세요'라고 답했다"며 "세계적인 스타인데 그런 마음을 보여줘서 나도 고마웠다"고 했다.
#오타니보다 아내가 더 스타
서울시리즈에서 오타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은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일본 여자 프로농구 선수 출신인 오타니의 아내 다나카 마미코(27) 씨다. 지난달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로 깜짝 결혼 소식을 전한 오타니는 이후 아내의 정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다 서울 원정을 앞두고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해 축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그가 인천공항에서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공개적인 장소에 모습을 보이자 전 세계 미디어와 야구 팬이 관심을 집중했다. 기자회견에서 오타니의 결혼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동석했던 다저스 동료 무키 베츠(31)와 프레디 프리먼(34)조차 "우리도 궁금한 내용"이라며 갑자기 동시 통역기를 착용하고 관심을 보여 웃음을 안겼을 정도다. 오타니는 "아내와 (미국 외에) 같이 해외에 나온 건 결혼한 뒤 처음이다. 우리 둘에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며 "일단은 내 할 일에 집중하는 게 먼저다. 한국에서 야구뿐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무척 기대된다"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다나카 씨는 그 후에도 남편 못지 않은 스포트라이트와 화제를 몰고 다녔다. 다나카 씨가 오타니의 어머니 가요코 씨 등 가족들과 함께 관중석에 나타나자 야구장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후 다나카 씨가 오타니 타석에서 두 손을 모으며 응원하는 장면, 큼직한 타구가 파울라인 밖으로 벗어나자 얼굴을 감싸며 아쉬워하는 장면, 첫 안타와 타점 등이 나오자 크게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장면 등이 모두 빠짐없이 방송을 탔다. 다나카 씨가 VIP 석이 아닌 1루쪽 일반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한 점도 화제가 됐다. 일본 닛칸스포츠는 "이날 다나카 씨가 오타니의 부모, 통역사와 함께 관중석에 앉아 시합을 지켜봤다"며 "그의 왼손 약지에는 빛나는 반지가 보였다"고 전했다. 일본 팬들은 온라인에서 "스카이박스처럼 좋은 곳도 있는데, 일반석에서 관람하는 검소한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본 TBS의 한 뉴스 프로그램에선 다나카 씨가 지난 16일 다저스 선수단의 저녁식사 자리에 들고 온 가방을 주목하기도 했다. 방송에 따르면, 다카나 씨는 이날 스파 브랜드인 자라(ZARA)의 5000엔(약 4만 4500원)짜리 숄더백을 맸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야구선수의 아내가 선택한 가방의 브랜드가 공개되자 온라인 상에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응원하고 싶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고 방송은 전했다.
#레전드 스타들, 서울로 집결
경기 전 그라운드는 3개국 프로야구 레전드들의 사랑방과도 같았다. MLB의 명문 구단 두 팀이 맞붙는 데다 한국의 김하성, 일본의 오타니·야마모토 요시노부(다저스)·다르빗슈 유·마쓰이 유키(이상 샌디에이고) 등이 두 팀에 몸담고 있기에 더 그랬다. 켄 그리피 주니어, C.C 사바시아, 애덤 존스, 데이브 윈필드 등 전설적인 MLB 스타들이 경기 전 선수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샌디에이고의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였던 '지옥의 종소리' 트레버 호프먼은 관중석에서 팬들과 사진을 찍어주며 인기를 누렸다. 또 다저스의 소액 구단주인 빌리 진 킹은 2차전에서 힘차게 "플레이 볼"을 외치는 역할을 맡았다.
일본 프로야구 레전드인 후루타 아쓰야, 마쓰자카 다이스케, 우에하라 고지, 후지카와 규지 등도 자국 취재진들과 함께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관찰했다. 김경문 전 NC 다이노스 감독, 김병현, 류현진(한화 이글스), 홍성흔, 황재균(KT 위즈) 등 한국 야구인들도 모습을 나타냈다. 재계에선 롯데그룹 수장이자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인 신동빈 회장의 얼굴도 보였다. 신 회장은 경기를 앞두고 다저스의 데이브 로버츠 감독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관중석에 나타난 한국 스타들의 면면도 대형 시상식을 방불케했다. 1차전에서는 축하공연을 맡은 걸그룹 에스파를 비롯해 지드래곤, 차은우, 지성-이보영 부부, 황재균의 아내인 지연(티아라) 등이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2차전에서는 현빈-손예진 부부와 공유, 이동욱, 김재욱, 문상민 등 유명 연예인들이 포수 뒷자리에 앉아 경기를 즐겼다. 송중기 부부는 스카이박스에서 샌디에이고 모자를 쓰고 박찬호와 함께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2차전 축하공연도 걸그룹 에스파가 맡았다.
1차전 시구자도 의미가 컸다. 다저스에서 9년, 샌디에이고에서 2년간 뛰었던 박찬호가 맡았다. 김하성이 특별히 포수 자리에 앉아 박찬호의 공을 받았다. 박찬호는 공을 던지기 전 후배 김하성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존중의 뜻을 전했다. 이어 파드리스와 다저스가 반반씩 섞인 '파저스(Podgers)' 유니폼을 걸쳐 입고 깨끗하고 정확하게 공을 던졌다. 손에는 30년 전 그가 MLB 데뷔전에서 썼던 글러브가 들려 있었다. 박찬호는 "이 특별한 순간을 위해 박물관에서 직접 꺼내왔다"고 털어놨다. 다저스 더그아웃에 있던 로버츠 감독은 박찬호의 시구가 끝나자 머리 위로 박수를 보내며 예우를 표현했다. 2차전에서는 대를 이어 MLB 그라운드를 누빈 '전설' 그리피 주니어가 시구의 '안내자'로 나섰다. 그는 직접 공을 던지는 대신, 함께 등장한 국내 유소년 선수들의 시구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다르빗슈의 팬서비스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한국에 온 양 팀 선수들은 국내 야구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샌디에이고의 일본인 투수 다르빗슈는 10년간 인연을 맺어온 한국인 팬 이광희 씨가 운영하는 서울의 한 카페를 깜짝 방문해 화제를 모았다.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부터 자신을 응원한 팬을 위해 직접 인증샷을 남기고 한 시간 가량 대화도 나눴다는 후문이다. 이 미담은 이 씨가 자신의 SNS로 소개하면서 알려졌고, MLB닷컴이 이 씨의 인터뷰를 다뤄 미국에서도 이슈가 됐다. 이 씨는 "다르빗슈가 카페까지 찾아와 정말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며 "10여 년 전 다르빗슈의 멋진 투구를 보고 팬이 됐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실력과 인성은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다르빗슈를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하겠다"고 활짝 웃었다. 이외에도 두 팀 선수들은 틈이 날 때마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생생한 목격담을 끊임없이 생산했다.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는 광장시장에서 먹거리를 즐겼고, 다른 스타들도 광화문이나 강남 등 서울의 명소를 찾았다. 양 팀 선수단 숙소가 있는 여의도 부근 쇼핑몰과 식당에서도 목격담과 인증샷이 쏟아졌다.
역사적인 서울시리즈의 결과는 사이 좋게 1승 1패. 첫날은 다저스가 5-2로 이겼고, 둘째날은 샌디에이고가 난타전 끝에 15-11로 승리했다. 두 팀 선수들은 경기 후 곧바로 전세기에 올라 나머지 160경기를 치러야 할 미국으로 향했다. 옛 홈 구장에서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낸 김하성은 "한국에서 메이저리그 경기를 한다는 게 정말 좋았다. 이렇게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며 "동료들 모두 한국이 정말 좋고, 음식도 맛있다고 하더라. 다음에 꼭 다시 와서 또 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